2019년 봄과 여름 엄마랑 양산을 나눠 쓰며 시 낭송을 배우기 위해 평생학습관을 다녔다. 엄마는 예전부터 시를 잘 쓰고 싶은 로망이 있었지만 시가 멀게 느껴져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시 낭송 수업을 등록하셨다. 다 같이 시를 낭송하다 보면 시의 또 다른 재미와 매력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시와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같이 다니자고 하셨지만 지금 돌아보면 20대 딸이 중장년층 사이에 있으면 어색하지 않을까 싶어 함께 다녀주신 것 같다.
당시 나는 '아나운서 준비생'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백수였는데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부산에 온 지 3개월 정도 됐었다. 부산에 있으면 사투리를 쓰게 되니 취업할 때까지 서울에서 지내고 싶었지만 모아둔 돈 2천만 원을 거의 다 쓴 상태였고 머무르는 곳이 서울이냐, 부산이냐 보다 중요한 건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시원 생활을 접고 고향에 왔다. 가족 곁에 있으니 혼자 지낼 때보다 심리적 안정감이 커졌지만 '아나운서 준비생'인 나를 더 채찍질하게 됐다.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며 친구, 가족과 거리를 뒀고 식당, 상점 등에 갈 때는 무조건 표준어를 구사하려고 애를 썼다. 표준어를 사용하는 공간에 나를 묶어두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부산에서 아나운서 준비하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 방 안에서 온라인 스터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 카톡으로 뉴스 단신 2꼭지와 장르 한편을 녹음해 올리고, 일주일에 2번 네이버 카페에 뉴스 리딩 영상을 올려 스터디원들과 피드백하는 시간을 가졌다. 꾸준함과 성실함이 동반되어야만 했던 스터디여서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지만 비대면으로 만났기 때문에 마음 한쪽이 심심했다. "언니 단발머리 하니까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이는 것 같아요." "소라 씨는 스퀘어 넥이 잘 어울리네요. 다음 카메라 테스트 때 그 원피스 입고 가요."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시간이 그리웠다. 같은 방향을 보고 달려가는 경쟁자이지만 서로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나눴던 사람들이 필요했다.
사투리를 비교적 덜 쓰고, 사람을 만나면서 아나운서 직업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도서관에서 배치한 평생학습관 안내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책자에 ‘감성 어울림 시 낭송 교실’이 적혀 있었는데 바로 이 수업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낭송을 배우면 사투리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고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전달력 있는 내레이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평생학습관 수업을 등록했다.
첫 수업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을 안고 엄마랑 20분 정도 일찍 평생학습관에 도착했다.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강의실 문을 열기도 전에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사투리들, 엄마랑 눈을 마주치며 우리가 결코 일찍 온 게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문을 여니 엄마보다 제법 언니들이거나 나의 친할머니 연배인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자리에 앉아계셨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여기저기를 살피는 우리 모녀에게 "여기 앉으면 되겠네. 어떻게 왔으예?" "엄마랑 딸이라고? 엄마가 윽수로 동안이네. 누가 보면 자매인 줄 알겠네."라며 어르신들이 먼저 다가와 주셨고, 수업 듣기 전에 목을 풀어야 한다며 따뜻한 차나 커피를 마시라며 뒷자리에 놓인 간식 칸을 안내해 주셨다.
신입생은 엄마와 나, 둘뿐이었고 다른 분들은 모두 기존 수강생이었다. 신입생이자 막내인 우리 모녀는 호기심을 띈 눈빛들을 마주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엄마는 시를 배우기 위해서, 시를 좋아하기 위해서 딸이랑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며 소개를 했고 나는 아나운서를 꿈꾸는 백수라며, 열심히 배우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목소리가 좋다는 강사님의 응원과 곳곳에서 잘할 수 있다, 안 늦었다는 위로의 말들을 들었다. 불합격 소식을 연이어 들어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취업 준비생에겐 단비 같은 말들이었다. 사투리와 멀어질 순 없어도 그리워했던 다정함이어서 시 낭송 수업에 마음을 활짝 열었다.
나는 낭송을 잘하기 위해서, 즉 전달력을 기르기 위해서라는 기술적인 목적으로 수업에 참여했지만 다른 학인들은 시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지난주에 배웠던 시를 모든 학인들이 당연하다는 듯 줄줄 외워왔다. 강사님이 내준 숙제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이번 주에 배울 시는 예습해오고, 오늘 배울 시의 작가는 누구인지, 어떤 배경에서 시를 쓰게 되셨는지까지 공부해왔다. 어떻게 공부를 해오시는지 여쭤봤더니 도서관에 가서 시집을 꺼내 읽으며 찾는다는 분도 계셨고, 자녀분들이 집에 들르면 그때 스마트폰 사용법을 물어가며 필사를 해 공부한다는 분도 계셨다. 시키지 않아도 하는 공부, 그 공부를 하는 학인들이 크게 보였다. 공부하는 할머니라니, 멋지지 않은가. 그해 봄과 여름을 그들과 함께 보내면서 나의 취업 준비에 대한 무게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도 어떻게 보면 누가 아나운서가 되라고 떠민 건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갖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책상 위에 앉게 됐다.
그들의 일상에 시는 제법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주를 재우고 나서 시를 읽는다는 학인, 집안일을 마치면 무조건 배웠던 시를 읽고 또 읽는다는 학인, 매일 저녁 남편에게 암송을 잘하는지 확인해달라는 학인 등 그들은 평생학습관을 벗어나서도 시와 함께 했다. 아끼는 시와 내 목소리가 입혀지는 그 순간이 아름다워서일까, 뭔가를 배운다는 뿌듯함, 성취감 때문일까, 낭송하면서 오롯이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어서일까.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모두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시보다 시를 아끼는 학인들이 좋아서 그들을 보기 위해 매주 수요일을 기다려졌다.
수업은 보통 지난주에 배웠던 시를 낭송하며 시작했다. “한번 낭송하실 분 계시나요?”라고 강사님께서 말하면 곳곳에서 손을 드셨다. 한 분이 멋지게 낭송하고 나면 다른 분께서 “선생님, 저도 한번 해봐도 될까예?”라며 용기를 내는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시여도 누가 낭송하냐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특히 시 어구를 표현하는 감정이 제마다 아름다워서 귀가 즐거웠다. 애송시를 낭송할 때면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담아 꾹꾹 낭송했고 독립 시, 항일 시를 낭송할 때는 모두 결의에 찬 독립투사의 마음으로 읽었다. 낭송을 감상하다 보면 눈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내용이 귀에 잘 들어왔다. 시인은 이 마음이었을 수 있겠구나, 이 감정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던 순간이 잦았다.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 리딩을 할 때면 우리는 당신의 성장을 위한다는 이유로 서로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기 바빴다. “어미가 어색해요.” “단락과 단락 사이에 쉼을 줘봐요.” “목소리 톤을 더 올려봐요.” 등 어찌 보면 그 친구의 매력이 될 수 있는 점까지 남다르다는 이유로 꼬투리를 잡았던 것 같다. 학인들과 낭송을 배우면서 저마다의 장점, 저마다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 가장 큰 발전은 예쁘게 읽는 것보다 진심을 담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는 점이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덕분일까. 나는 그해 취업을 했다. 2년 남짓 취업 준비 시절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 기뻤지만 시 낭송 수업을 함께 했던 학인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제법 무겁게 다가왔다. 그들에게 받았던 사랑, 그들 덕분에 알게 된 시의 매력, 진심은 어디서든 중요하다는 깨우침까지. 받은 것들이 많아 나도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해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는 라디오 시민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학인들의 목소리를 전할 기회가 있었다. 나의 마지막 시 낭송 수업 날, 녹음기를 들고 수업에 참여했다.
“선생님들께 시 낭송은 어떤 의미인가요?”
“은하수다. 왜냐하면 너무 틔지도 않고 은은하면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니까.”
“좋은 보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는데 여기 오고 나서 굉장히 활력을 얻고 건강해졌습니다.”
“나에게 시 낭송은 마음의 여유? 시만 들여다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시 낭송이란 설렘이다. 어릴 때 접했던 시의 감정과 나이가 먹어서 다시 보는 시어들이 너무나 저를 설레게 합니다.”
“저에게 시 낭송은 감성 여행이다. 여행을 꼭 비행기 타고 가거나 멀리 가서 즐기는 것도 좋은데 시를 통해 여러 감성 여행을 할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시 낭송은 나에게 기다림이다. 항상 일주일이 기다려지고 수요일이 기대되고 많이 설렙니다.”
“나에게 시 낭송이란 영혼의 목욕탕이라 생각해요. 지치고 피곤하고 그렇잖아요. 시를 접하면 내가 지친 영혼과 육신을 말끔히 치유할 수 있어서요.”
“나에게 시 낭송이란 힐링이다. 왜냐면 우리가 힐링하기 위해서 산에도 가고 운동도 하지만 전 여기 와서 웃음도 얻고 머리도 맑아지고 나에게 시 낭송은 힐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담은 7분가량의 녹음이 라디오에 송출됐다. 이후 나는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두 방송 탔다며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렇게나마 감사 인사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다는 마음을 안고 그들과 함께 했던 추억을 잠시 접어뒀던 것 같다. 다음 해인 2020년 봄,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곳곳이 문을 닫고 단절된 일상을 지낼 때 학인들의 삶의 모양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걱정이 됐다. 매주 수요일만 기다리던 어르신들은 어떻게 그 헛헛함을 채우고 계실지 신경이 쓰였다. 안부는 직접 전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걱정을 하면서 2년, 3년의 시간을 보냈다. 2023년 봄과 여름 사이, 4년 만에 평생학습관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2023년 2분기 감성 어울림 시 낭송 수업’은 여전히 마감이다. 참 다행이다. 시에 대한 애정이 여전하시구나. 문틈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소리, 겹겹이 쌓인 그들의 시 낭송이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