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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리나 Aug 04. 2018

기록 사진의 전설로 남은 작가
로버트 카파

문화예술인열전 2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 로버트 카파-


전쟁 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1944년 6월 6일에 실시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래된 흑백영화의 필름처럼 초점이 뿌옇게 흐려진 영화의 첫 장면은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재현한다. 노르망디 지방의 오마하 해변 부근에 내린 연합군 병사들의 모습에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차가운 바닷물은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상륙정에서 내렸지만 해안까지는 100미터나 남아 있는 상태에서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들어 물이 사방으로 튄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종군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기록 사진을 바탕으로 이 장면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버트 카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륙정을 타고 병사들 틈에 섞여 직접 상륙작전의 현장을 찍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종군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총알이 나를 빗겨가 물을 때리고 있었고 나는 가장 가까이 몸을 숨겼다. 좋은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이르고 어두웠다. 하지만 잿빛 바닷물과 잿빛 하늘은 군사들이 히틀러의 반침략 작전이 가져온 초현실적인 상황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카파가 목숨을 걸고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사진 현상을 하던 암실 조수 역시 흥분한 나머지 건조과정에서 너무 많은 열을 가하는 바람에 유제가 녹아 필름이 대부분 망가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106장의 사진 중 고작 8장을 건졌는데, 《라이프》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특집 기사를 실으면서 사진에 '카파의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라는 설명을 붙였다. 이런 설명이 붙은 이유는 카파의 손이 떨려서 사진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찍은 전쟁 사진과 종군 기록은 훗날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카파는 언제나 사진기만 들고 포탄 속으로 뛰어들어, 총을 맞고 쓰러지는 군인, 전쟁터를 가득 메운 무수히 많은 시체 등 전쟁의 처참한 모습들을 생생하게 필름에 담아 냈다. 전쟁터에서 그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뷰 파인더에 밀착하는 것뿐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1930년에서 1950년에 사이에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는 수많은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전쟁의 비참한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20세기 최고의 종군사진작가 로버트 카파는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프리드먼 엔드레 에르뇌(Friedmann Endre Ernő)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931년 그는 좌익학생운동을 시작했고 헝가리 정부의 탄압을 피해 독일 베를린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장면을 촬영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첫 번째 기록사진이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NSDAP)이 집권하자 그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을 쓰며 사진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카파는 연인이자 동료였던 게르다 타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둘은 모두 유대인이었고, 나치의 탄압을 피해 헝가리와 독일로부터 도망친 망명객들이었다. 비운의 연인 타로와 카파는 파리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카파는 타로에게 사진을 가르쳤고, 둘은 곧바로 전쟁터를 함께 누비며 수많은 참상을 기록했다.  

연인 타로와 함께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러 간 로버트 카파는 결정적인 사진 한 장을 찍게 된다.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까지 불러 일으켰던 그 사진은 '병사의 죽음'이라는 작품인데, 한 병사(페데리코 갈시아)가 팔을 벌린 채 죽음의 상황을 맞이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연출된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찍을 수 없다는 논란과 함께 로버트 카파를 전 세계에 알린 사진으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스페인 내전 가운데서 둘은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카파가 잠시 파리로 돌아간 사이, 혼자서 사진을 찍던 타로가 탱크에 깔려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가장 소중한 삶의 동반자를 잃은 카파는 이때의 충격으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타로의 죽음 이후 카파는 슬픔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몰두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을 비롯해 1938년에는 중일전쟁을 취재하였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41년 미국이 참전한 뒤 《라이프》잡지 소속기자로 본격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의 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을 거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리 해방, 미군의 독일 낙하산 투하작전 등을 취재하였다. 이 중 파리에서 촬영한 사진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독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한 미군 병사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지금까지도 많이 알려진 사진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등 삶과 죽음의 현장을 누비며 수많은 작품을 찍었으며, 1954년 인도차이나전쟁의 와중에 베트남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많은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투철한 기자정신을 ‘카파이즘(capaism)’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버트 카파는 현대 사진역사의 새 경지를 개척했으며 평생지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모어와 손잡고 다큐사진가 모임 '매그넘'을 만들어 현재까지도 저널리즘 사진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의 동생 코넬 카파는 1966년, ‘관심 있는 사진을 위한 국제 기금(International Fund for Concerned Photography)'을 설립하였고, 1974년에는 카파가 촬영했던 사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을 설립하였다. 미국의 전쟁기자 그룹 ‘해외 취재클럽(Overseas Press Club)’은 '로버트 카파상'을 제정하여 "대담한 용기와 진취적 정신이 이뤄내는 최고의 외신 사진"을 촬영한 사진기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2013년 8월 2일부터 10월 2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로버트카파 탄생 100주년과 한국 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한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이  개최되었다. 로버트카파의 일대기를 총망라한 대표 사진 160여점이 전시되었는데, 사진들은 그의 기념 재단인 뉴욕 ICP가 소장한 오리지널 프린트였다. 로버트카파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과 로버트 카파의 다양한 소품도 전시되어 한국의 카파팬들을 즐겁게 했다.

카파는 최전선에 섰던 최초의 전쟁기자였다. 카파는 미군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어떤 부대들은 카파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전쟁을 싫어한 전쟁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전쟁에 대한 혐오가 내포돼 있다. 기록사진의 전설로 남은 로버트 파카, 그가 남긴 다음의 말에서 우리는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그의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진실이야말로 최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선전선동)이다(The truth is the best picture, the best propag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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