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로보트에서 밥까지

by 소라비

맥아더 장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낀 적 있다. 현지인 친구와 역사 얘기를 나누다 그 이름을 꺼냈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해도 모른단다. 이 정도는 상식 아닌가, 잠시 우쭐했다.

증거를 대려고 검색을 했다. M-e-g-a-d-e-o. 안 나왔다. 혹시 M-e-g-a-t-h-e? 없었다. 한글로 쳤더니 영어 스펠링이 떴다.

M-a-c-A-r-t-h-u-r

저런. 한국식으로 매가더로 읽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맥, 알썰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맥(한 번 끊어주고), 알(악센트를 넣어서), 썰(짧게 치고 빠지며).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 쓰여 있어서 철석같이 믿었건만. 그날 이후로 사람들의 이름을 들으면 한 번 더 확인하게 됐다.

이 나라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을 갖기도 한다. 서류상엔 Robert인데 전화하면 "Rob speaking."이고 만났더니 Bobby란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Robert가 Rob인 건 이해한다. 음절을 줄인 거니까. 근데 그게 밥이 된다고? 갑자기요?

William - Will - Bill - Billy
Elizabeth - Liz - Beth - Betsy - Eliza
Margaret - Maggie - Meg - Peggy
Richard - Rick - Richie - Dick

규칙을 찾으려 했지만 없었다. 법적 본명은 Elizabeth Anne Thompson, 사무실에서는 Liz, 학교 친구는 Beth, 가족은 Betsy, 동네 친구는 Anne. 관계마다 다르게 통한다.

성명만 보고 성별을 가정하지 않는다. Alex는 Alexandra인 여성일 수도, Alexander인 남성일 수도 있다. Sam은 Samuel이거나 Samantha거나. Jean을 장으로 발음하면 프랑스 남자, 진으로 발음하면 영어권 여자다. 만나기 전에는 모른다.

한국에서는 보통 이름이 하나다. 우식이를 우나 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태어날 때 받은 성명이 공문서에도, 친구나 가족 사이에도 똑같이 쓰인다. 그마저도 김 선생님, 이 팀장님, 우식이 엄마가 된다. 이름이 쓰일 자리가 좁다.

난 영어명이 없다. 대단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문제는 스펠링을 살짝 꼬았다는 거다. 너무 평범해서 킥을 넣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릴 줄 알았으면 그냥 무난하게 갔을 텐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명함에 적힌 알파벳 덩어리를 보고 잠시 얼어붙는다. 용감한 사람은 입술을 떼어 발음해 본다. 대부분은 포기하고 쉬운 내 성으로 직행한다. 틀리게 불린다. 매일. 거슬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불린다. 엉성하게 불려도 내 이름은 살아있다. 명함에 발음 기호를 직접 적어 넣는 사람도 있다. 다음에는 더 잘 부르려고. 성의가 고맙다.

여기서는 이름이 나를 떠날 일이 없다. 회사 대표도 그냥 Tom이고, Dr. Thompson도 사석에서는 John으로 불러달란다. 20대와 60대의 Ann은 서로 "Hi Ann." 한다. 이름이 역할이나 관계 뒤에 숨지 않는다.

이름이 문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우체국에 갔다. 봉투에 적힌 내 이름을 본 직원이 물었다. 코리안이냐고. 그렇다고 했더니 눈이 반짝였다. 넷플에서 사극 드라마를 보며 한복에 푹 빠졌단다. 몇 번 나를 부르려다 포기했다. 그래도 문이 열렸다.

한자를 쓰는 고객 앞에서는 종이를 꺼낸다. 내 성명을 한자로 적어주면 천재 보듯 한다. 뜻풀이를 하며 말문을 튼다. Fernandez면 오렌지와 플라멩코와 알함브라 성으로 대화가 흐른다. Guillaume이면 마티스나 몽블랑으로.

"당신을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주도권을 이름의 주인에게 넘긴다. 내가 편한 대로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직함도 관계도 아닌 나 그대로.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