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다시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이 시작되었지만 여행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인지 나는 또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때는 마침 3월, 친구들이 개강을 하고 MT와 신입생 환영회 얘기로 시끌벅적할 때, 조용히 혼자 일본으로 3주간의 여행을 떠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노예처럼 일한 돈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알아보고, 환전을 하는데 단 일주일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이 어려서 군대도 못 가고, 학원도 그만뒀고, 스타일리스트도 때려치웠고,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은 나의 3주간의 도피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이 어땠는지에 대해 쓰려니 기억이 나지 않아서 여행기를 살펴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다. 1. 돈이 부족해서 힘들다 2. 혼자 와서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게 전부다 3. 심심하고 외로워서 미칠 것 같다. 4. 집에 가고 싶다. 혼자 여유롭게 낭만을 즐기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싶었는데, 다른 의미로 잊지 못할 기나긴 여행이 되었다. 일본을 3주씩이나, 게다가 고베, 교토, 오사카 근접한 세 도시에 일주일씩 머물렀으니 오죽했으랴. 사람들 말 듣고 그냥 짧게 3박 4일로 다녀왔어야 했다. 그러면 여행 경비 안에서 부족함 없이 다녀올 수 있었을 텐데. 게다가 몇 번 가본 일본이라고 혼자 만만하게 여행 준비를 게을리한 것도 반성하게 되었다. 바로 여행 첫날부터.
오후 비행기라 여유롭게 공항에 갔고, 항공기 지연으로 인해 시간이 많이 비어 있길래 밥도 먹고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하도 심심해서 비행기 표를 확인해보니 내가 다른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 아니겠는가!! 그 길로 바로 뛰어서 게이트에 도착했고, 다행히도 항공기 출발이 계속 늦어져서 무사히 탈수 있었다. 오사카 공항에 도착해보니 밤이었다. 깜깜한 밤에 나 홀로 일본에 내려졌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공항에서 고베 숙소까지 이동하는 길을 제대로 알아 놓지 않았던 나는 더욱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와 일본어가 섞인 표지판을 읽어가며 고속버스 표를 끊고, 기사님께 다시 한번 고베 가는 게 맞는지 확인하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1시간 30분가량 쉼 없이 달렸는데, 아마 그 버스에 나만 외국인이었던 것 같다. 불안했지만 그냥 어떻게든 가겠지 라는 마음에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어차피 나는 왠 자신감이었는지 휴대폰 로밍도, 와이파이 도시락도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넷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내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는 구글맵만 보고 일본 여행을 했다. 숙소에 와이파이 될 때 가는 길을 캡쳐하고, 그 캡쳐를 보면서 길을 찾곤 했는데, 나중엔 3주간 일본에 있다 보니 어느새 오사카 주민 정도의 길을 익힐 수 있었다.
고속버스는 나를 고베 터미널에 내려주었다. 밤 12시를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여기서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 가야 하는데... 지하철이 어디지??’ 나와 함께 내린 사람 중에 캐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이 있길래 일단 무작정 뒤를 따라갔다. 그 사람은 왠지 역에 갈 것만 같았고, 절망적이게도 그것이 가장 믿을만한 단서였다. 내 촉이 살아 있었는지 그 사람은 나를 역으로 인도했다. 지하철을 타고 보니 내가 정말 일본에 와 있구나 라는 생각에 조금은 신이 났다. 그러나 내려서 캡쳐해 둔 지도를 보아도 늦은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갔다. 이쪽이다 싶으면 그쪽으로 가고, 저쪽이다 싶으면 저쪽으로 갔다. 여기 어디쯤인데~ 하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호스텔이 딱 보였다. 정말 하늘이 나를 살피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체크인을 했고, 일주일 간 머물 숙소에서 편히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는 마치 여기가 내 집인 것처럼 늦게 일어나서 아점을 챙겨 먹고 밖으로 나갔다. 어젯 밤에 마냥 무섭게만 보였던 도시가 아침을 맞아 따스하게 빛이 나고 있으니 사뭇 달라 보였다. 날씨는 말 그대로 화창했다. 역 근처에 먹거리와 볼거리가 많다고 해서 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정확히는 눈보다도 기억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어디선가 많이 본 타워가 있었고, 그 옆에는 마치 내가 첫 해외 출장을 왔을 때 묵었던 호텔처럼 생긴 호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오사카로 공연을 왔기 때문에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통역사분이 그 타워 보면서 뭐라고 설명해 주셨던 것 같은데... 그리고 저쪽에 보이는 관람차는 선배가 사진 찍어 카톡 배사에 해놓은 것 같은데... 딱 작년 이맘때쯤의 일이 자꾸 떠오르는 이상한 경험을 했고, 결국 나는 내 기억이 정확히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고베에 와 보고 싶어서 첫 여행지로 고른 건데, 나는 이미 첫 출장 숙소가 고베였구나,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내가 스타일리스트 일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서 일부러 호텔 앞까지 가서 사진도 찍고, 아련한 기분을 한껏 만끽했다.
3월이라 조금 쌀쌀한 날씨였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이곳은 정말 좋았다. 앞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고베 타워와 관람차가 돌아가는 예쁜 도시. 나는 둘째 날 이곳(고베하버랜드)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다. ‘다음엔 꼭 가족들과 함께 오고 싶다’ 우리 가족은 돈도 없고 바쁘다는 이유로 여행을 자주 가지 못했고, 여섯 명이 다 같이 간 여행은 정말 적었다. 특히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가족들을 이끌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베는 작은 도시여서 하루 이틀 만에 볼만한 것들은 다 보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늦게 일어나서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고, 혼자 들어가서 먹을만한 음식점들을 기웃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정말 좋았던 점은, 일본 음식점은 혼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점이다. 한국 식당은 혼자 가면 민망할 정도의 큰 테이블과 앞이 뻥 뚫린 공간이 대부분인데, 일본은 1인용 테이블이 많아서 혼밥이 절대로 눈치 보이지 않았다. 돈이 많이 없었기에, 맛집보다는 양이 많고 싼 곳으로 찾아다녔다. 어딜 가나 음식으로 고생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이것저것 메뉴를 돌려가며 먹는 재미가 있었다.
고베에서 점점 따분해질 무렵 교토로 떠날 시간이 왔다. 새로운 곳에 간다는 생각에 설렜지만 여행 2주 차에 교토는 정말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어딜 가야 하지? 교통비를 줄이려고 30분 걷는 거리도 걸어다닌 탓에 다리가 점점 아파왔고, 여유롭게 차나 한잔하며 즐기려던 계획은 돈이 없어 무산으로 돌아갔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날은 교토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항상 화창하다가 그날은 하루 종일 부슬비가 내렸다. 일주일 내내 지루해서 어느새 침대 위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던 나는, 비가 오는 거리는 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밖으로 나가보았다. 교토의 집들은 다 옛날 집이어서 옛 일본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고, 아기자기한 대문과 소품들이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특히 비가 왔던 그날은 촉촉해지는 감성에 멀리 학교에서 들리는 음악소리까지 곁들여져 그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고 지루해 하던 나날들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지루했던 교토를 떠나 도착한 곳은 오사카였다. 교토에 있을 때 하도 심심해서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알아보고, 블로그에 글도 쓰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내가 오사카에서 묵는 숙소 주변에 일본 최대의 할렘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지와 노숙자들이 역 주변에 모여서 그곳은 현지인조차 발길을 돌리는 곳이고, 밤에는 무조건 조심해야 된다고 들었다. 첫날 숙소에 일찍 도착한 나는, 체크인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비어서 근처에 서서 조금 기다렸다. 그런데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마치 다른 세상인 마냥 잿빛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순간 그곳이라는 걸 알았고, 환한 대낮이었음에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주변에는 욕설을 하며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아저씨도 돌아다녔고, 그 거리에는 낡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배회 중인 사람도 있어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체크인을 하고 나서 방에 들어왔을 때야 비로소 안심했다. 호스텔이 규모가 크고, 외국인이 많이 묵고 있어서인지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여행 내내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던 나는, 작고 춥지만 처음으로 혼자 쓰는 방이 좋았다. 밖이 너무 무서워서 나가기도 싫어서 나는 저녁을 먹으러 나 겨우 나갈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 물가는 저렴했다. 오사카 내에서 가장 물가가 저렴한 구역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저렴하지만 안전은 위험한 곳이었다. 절대로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고, 나는 그 뒤로 최대한 할렘가를 피해서 걸어 다녔다. 숙소에서 걸어서 20분이면 오사카 시내에 갈수 있었는데, 그 말을 즉 시내와 할렘가가 무척이나 가까웠다는 뜻이다. 세상이 반으로 나뉜 것처럼 화려하고 밝은 이곳과 어둡고 먼지 낀 그곳은 정말 대비되었다. 처음으로 그런 거리를 본 나는 두려움이 앞섰다. 돈이 없어서 저렇게 사는 것일 텐데, 두려움이 앞서는 나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는 시간도 되었다. 그들이 만약 돈이 많았다면 저렇게 살진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오사카에서는 굉장히 신나고 재미있게 놀았다. 주유패스를 이용해서 지하철도 무제한으로 타고 다녔고, 패스권 하나로 여러 관광지를 무료입장했다. 게다가 시내가 가깝고 시내에 가면 볼거리가 많아서 매일같이 시내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내가 3주 정도 일본에서 지내다 보니 내가 일본인이 다 되었는지 어떤 할아버지가 일본어로 내게 길을 물어보시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느낀 점은 여행은 돈이 많거나 사람이 함께 가야 재미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혼자 매일같이 간식거리를 사 와서 맛있게 먹으며 내일은 또 어딜 가볼까 고민하는 시간은 한국에 있을 때 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한국에서는 쉬고 있으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뒤따르니까. 그렇지만 그 압박을 느낄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고, ‘나는 집에 가고 싶다!’ 라는 마음과, ‘그렇지만 한국에 가긴 싫다’ 라는 마음이 엉켜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쇼핑을 잔뜩 해서 무거운 캐리어로 비행기에 올랐고, 돈도, 데이터도 없이 혼자 훌쩍 떠난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