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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DoG Oct 29. 2020

흔한 취준생 이야기

학원을 그만둘 즈음 나는 공채 사이트에서 엔터테인먼트 비주얼 디렉터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비주얼팀 막내를 구하는 공고였고, 아티스트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면 되는 조건이었다. 학원을 그만두기가 무섭게 나는 알바를 하며 포트폴리오 만들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기한이 여유 있는 공고여서 나는 계속 나태해져갔다. 대충 ppt를 켜 놓고 이미지를 모아 보다가도 싫증이 나면 노트북을 덮었고, 친구과 카공(카페에서 공부하기)를 한다는 이유로 매번 음료값만 잔뜩 내면서도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가자 점점 틀이 잡히기 시작했고, 결국 포트폴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 폰트부터 디자인, 그리고 시안 이미지까지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 담긴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자 커다란 뿌듯함이 나를 감쌌다. ‘그래 나는 한다면 하는 아이였어!’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입사지원을 하려고 공고를 찾았는데, 이미 마감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기한은 한참 남았을 텐데? 내가 잘못 봤나? 그러나 내가 놓친 부분은 마감일 아래에 작게 적혀있는 ‘인원 선발 시 조기 마감’ 이라는 문구였다. 결국 아무리 잘해도 선착순일 수밖에 없는 공고였던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엔터테인먼트 이메일로 포트폴리오를 보내놓고 아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에는 내 일이 아닌가 봐, 하지만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공채 사이트의 이런저런 정보들을 보게 되었는데, 패션 디자이너 일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젠 정말 내가 원하는 걸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내가 패션 디자인을 좋아하지만 자꾸 미뤄왔던 이유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내가 평생 할 일이라고 믿고 있는데, 혹시 내가 이걸 시도했다가 재능이 없으면 어떡하지? 혹은 실패하면 어떡하지? 나 같은 디자이너를 뽑아주긴 할까? 이게 안되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시작해야 할 일이었고, 시간이 되고, 학원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때였으니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인, 잡코리아 같은 구직 사이트에 접속하고 이력서를 수정 보완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취준 일상이 시작되었다. 처음 해본 취준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람을 구하는 곳은 많았지만 많은 곳이 나와 조건이 맞지 않았다. 대졸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거나, 2년 이상의 경력 혹은 성별 제한을 두는 곳도 많았다. 남자는 당연히 군필을 우대했고, 운전면허 필수인 곳이 굉장히 많았다. 이력서를 넣기도 전에 입구 컷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운전면허 시험을 보면서 취준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이제껏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던 이유는 굳이 필요하지 않아서였지만 이제는 필요에 의해 따기로 했다. 나는 운전을 좋아하지도 않고, 부모님도 차가 없어서 운전할 일도 없을 줄 알았다. 처음 차를 운전하려니 긴장해서 온몸에서 땀이 났다. 바보 아니면 다 붙는다던 면허 필기시험에서 한번 떨어진 나는 더욱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최대한 잘 배워서 시험에 한 번에 통과해야 시험료를 아낄 수 있었기에 재시험만 피하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가르쳐 주시는 아저씨들은 정말 불친절하고 처음인 나에게 자꾸만 화를 내서 기가 많이 죽었지만 다행히 시험에는 모두 한 번에 통과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이후로 운전에 거부감이 생겨서 아직까지도 운전이 두렵다. 운전면허를 배울 때는 지문으로 출석체크를 했는데, 나는 손에 땀도 많고 기포도 많이 차서 지문인식에 항상 어려움을 겪었다. 나만 혼자 10분씩 지문을 찍기도 했고, 열 손가락 지문을 모두 등록해서 그중에 그나마 잘 찍히는 걸로 대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날 도와주지 않는 손과 지문이 너무 미웠다. 내가 왜 이렇게 손에 땀이 많은지, 난 왜 이런 쉬운 것도 못하는지 속상한 순간들이 많았다. 


취준도 마찬가지였다. 조건 맞는 곳에는 무조건 이력서를 넣으며 그렇게 하루에 적게는 10곳에서 많게는 50곳에 지원을 했지만 연락 오는 곳은 극히 적었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군필 문제와 운전면허 문제로 인해서 면접 보기도 전에 연락이 끊기곤 했다. 좋은 기회로 몇 군데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탈락을 하던 차에 한 의류회사에서 면접 제안이 들어왔다. 서울 동대문 주변에 있는 도매업체였는데, 결국 그곳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취업을 하게 되어서 아직 운전면허 시험도 남겨 놓은 상태였고, 아르바이트도 있었지만 다 내려놓고 월요일부터 출근을 했다. 가서 내가 했던 일은 불량 처리였다. 옷에 이염이 되었거나 나염 불량, 혹은 봉제 불량인 옷들을 하나하나 살펴서 살릴 수 있는 옷은 얼룩을 제거하거나 실밥 정리를 해서 살렸고, 구제불능인 옷들은 문제별로 모아서 정리를 했다. 탕탕이라는 기계로 옷에 묻은 오염을 제거했는데, 탕탕이로 쏘는 약품이 상당히 독한 약품이었고, 실내에서 계속 작업을 하다 보니 머리가 살짝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그 일만 기계처럼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6명 정도 되었는데, 나쁜 사람은 딱히 없어 보였다. 아, 사장님을 딱 한 번 보았는데, 사장님은 진짜 질 나쁜 사람이었다. 직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바탕 사무실을 뒤엎고는 사라지셨는데, 아마 나라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듯하다. 


이틀째 일을 하고 퇴근을 하는데, 사수께 장문의 카톡이 왔다. 첫 줄은 고맙다는 말로 시작하길래 나중에 읽어야지라는 생각으로 잠깐 두었다가 궁금해서 읽었는데,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 내일까지만 출근하라는 통보였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 내가 너무 소심하게 굴었나, 내가 너무 어린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사수가 너무 미웠다. 내가 잘린 이유는 다른 더 괜찮은 사람을 뽑았기 때문이라고 말은 했는데, 나는 그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나는 내 이력을 숨김없이 말하고 이 회사에 들어왔고, 갑작스럽게 바로 출근해달라는 요청에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여기로 온 건데 나는 그냥 잠깐 동안 불량 검사 시키려고 나를 고용했고, 내가 일하면서 본 많은 면접자들 중 한 사람이 결국 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졸지에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사수의 잘못 백 퍼센트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저 더 좋은 사람이 오기 전까지 허드렛일을 해줄 알바였던 것이다. 


그 다음날 출근하면서 어떻게 사수를 엿 맥일지 고민했다. 그러나 출근하자마자 사수가 날 불러 퇴사 이유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다. 사장님이 일방적으로 올린 공고 때문에 계속해서 면접자가 왔었고, 우리는 오토바이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마침 조건이 맞는 사람이 나타나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그리고 원한다면 한 달 정도는 계속 일을 하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볼 수 있게 사장님께 얘기해줄 수 있다는 식의 얘기였다. 어이없고, 변명이 안 된다는 것도 알았지만 이 사람을 너무 미워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준비해온 할 말을 정확하게 전달했고, 이미 정떨어진 회사에 굳이 남아서 불량을 처리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날로 회사는 나왔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사수는 그날따라 나보다 일찍 퇴근했다. 나는 다른 직원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는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그러면서도 최대한 사수가 잘못한 것처럼 말을 하려고 했다. “제가 ...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제가 오늘부로 짤려서” 그 순간 뭔가 목을 탁 막는 느낌이었다. 담담하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막상 내 입으로 ‘짤려서’ 마지막이라는 얘기를 하니까 당장이라도 뜨거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마지막 멘트를 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잘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직원분이 다가와 토닥토닥해주셨고, 다들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빨리 빠져나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지하철역까지 뛰어가는 동안 나는 펑펑 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창문으로 충분히 우는소리가 들렸을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첫 취업 아닌 취업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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