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불안한 핑크의 세게에서 윤석남1(1939- )
윤석남, 핑크룸4 1998년
삼십 대 초반, 한창 첫 그림책 작업을 하던 나는 정오 무렵, 영화를 보러 갔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부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우울 속에 아이를 맡기고 혼자 호텔로 가서 약을 삼킨다. 호텔 침대 위에 누운 여자와 온 방에 차오르던 물, 그 속에 고요히 누워있던 여자의 이미지가 지금도 또렷하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맡길 아이도 없는 나였지만 그녀가 왜 그러는지 그냥 알 것 같았다. 당시 작업 중이던 그림책의 출간은 미정이었고, 밤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문득문득 이게 허망한 짓은 아닌지 자주 의심했다. 내게 재능은 있는지, 그림이 밥벌이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도 작업을 놓지 못했다. 나는 존재 증명에 목마른 애처로운 삼십 대였다.
영화는 인기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른 시간 탓인지 극장 안의 관객은 열 명도 되지 않았고 모두 여성이었다. 내 앞줄에 있던 중년 여성이 나처럼 혼자 영화를 보러 와 내내 훌쩍였다. 사실은 이 기억이 영화보다 더 오래 남았다. 아직 정오, 한낮의 나이의 나는 마흔이 넘으면 저 눈물의 의미를 알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영화를 본 뒤 서점에 가서 『댈러웨이 부인』을 샀지만 아직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이 영화는 눈치챘겠지만 <디 아워스>다.
-가부장제 안의 박제화된 삶, 그 불안의 멘탈리티
일상을 뚫고 올라오는 이 투명한 우울은 그 실체가 분명치 않아 더 불안하다. 배수아의 소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읽을 때에도 먼지 이는 국도변의 사과 파는 중년 여자에 나를 대입하며 막막했다. 오정희와 김채원을 읽으면서도 위태롭고 공허한 주인공들에게 공명했다. 단지 내가 감수성 예민한 여자아이라는 이유로는 그 기이한 불안과 우울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피부에 달라붙어 나를 따라다니는 불안은 무엇에 연유한 것일까?
순간순간 떠오르는 자의식과 이것을 다시 싹싹 지우는 이 사회의 검열. 자의식 예민한 여자아이들이라면 더욱 민감하게 움츠려 드는 이 불안의 거미줄.
윤석남의 핑크룸 연작들 앞에서 내 불안이 핑크색이란 걸 알았다. 화사한 핑크룸에 갇혀 살 수 없다는 걸 무의식으로 알고 있는 여성들은 정체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다 미친년이 되기도 한다.
작가 윤석남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40대에 그림을 시작한 것은 나의 여정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이유 모를 불안에 대한 몸부림이었다. 그 당시 중산층이고 경제적인 걱정은 하나도 없었고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한데, 굉장히 불안하고 말할 수 없이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다. 그때의 모습을 핑크룸에 형상화했다."
세대를 넘어, 결혼의 유무를 넘어 여성들이 공유하는 이 불안과 우울을 사회는, 남자들은 쉽게 말한다, 배가 불러 그렇다고. 배를 곯지도 않고 집도 절도 있고, 사랑하는 이도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안온한 거실, 안락한 소파만으로 여자는 살 수 없다.
윤석남의 핑크룸 연작들은 1995년의 설치 작품, <금지구역 I>에서 이미 그 기원을 볼 수 있다. 중산층의 거실에서 볼 법한 의자에 솟아있는 날카롭고 뾰족한 뿔들, 의자의 다리도 칼날 같다. 검은색의 테두리 사이에 역시 칼날 같은 발을 세워두고 있는 여성 입상, 모노톤으로 그려진 여성은 오랜 시간 우울 속에 침잠한 것 같지만 칼날 같은 발을 금 밖으로 내딛고 있다. 저 검은색의 테두리는 사회가 제시하는 가부장제의 앙상한 울타리다.
1996년 이후 다섯 번의 버전이 있는 설치작품 <핑크룸>은 바닥에 온통 핑크 구슬이 깔려있다. 핑크 구슬은 칼날 같은 발로 헤쳐 나온 가부장제의 온갖 감언이설, 혹은 협박이다. 여성을 옥죄는 자기 의심, 자기 검열의 유리구슬들, 그 구슬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가차 없이 고꾸라지는 수많은 ‘나’들.
휘황한 자개가 박힌 여성 입상의 입꼬리는 단 한 번도 올라가지 않고 핑크 소파 위에 어색하게 놓여있다. 이미 소파를 뚫고 나온 칼날은 “여기는 너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소파 역시 위태로운 다리로 지탱하고 있다. 더 이상 여기에 미련을 갖지 말라고 한다.
- 불안해도 괜찮아, 여성은 불안을 먹고 나날이 성장한다
불안의 삼십 대를 건너왔지만 나의 불안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존재 증명과 인정 욕망에 흔들리지만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불안을 친구 삼아 마흔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가부장제의 울타리 안에 살든 가부장제 밖에 살든, 여성은 자기 존재가 지워질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린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불안은 남성 중심의 사회가 끊임없이 여성에게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다. 가정을 꾸려라, 아이를 낳아라, 여자 팔자는 뒤웅박이다.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데올로기는 21세기에도 여전하다. 하지만 여성의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이대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을 여성은 삶의 어떤 시기마다 만난다. 그래서 여성들은 불안을 잊기 위해 사회적 성취에 매달리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격증을 구하려고 종종거린다. 더러는 핑크룸의 동맹자, 수호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은 안다. 이 불안을 응시해야 한다는 것을. 불안을 대면할 때 그 불안은 무엇보다 강력한 힘이 된다. 가부장의 질서 밖에서 그 불안은 아름답게 피어올라 나는 나날이 명료하고 명징해진다. 불안해도 괜찮아, 어차피 삶은 불안을 먹고 성장한다, 여성이라면 더더욱!
2019년 일상비평웹진쪽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