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용한 언니 Sep 18. 2024

달라의 교환 일기_다섯 번째 2

‘매우 그렇다’에서 동지들을 기다리겠습니다

Dear. 소라 


한 달 전쯤 복직과 동시에 쏟아지는 일 속에서 시간이 폭풍처럼 흐른 느낌이네요. 잠시 멈출 여유를 주는 긴 명절 연휴에도 마음이 그리 평온하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편지에 소라가 최근 이슈가 된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을 보며 제 생각이 났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저는 이 사건의 심각성을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느라 꽤 분주하게 지내긴 했습니다. 이름과 얼굴이 언론에 나오는 게 싫고 부담스럽지만 그렇게라도 제 역할을 해야겠다 싶어 이번엔 인터뷰도 거절하지 않았고요. 강의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건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피해자를 위한 메시지를 함께 쓰고 그것을 온라인에 공유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하도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세상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지옥 같아진 듯한 사건이 계속 드러나니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특히 여자들은 무기력해졌다는 이야길 많이 해요. 그래서 뉴스도 피하고, 사건에서 멀찍이 떨어져 최소한 나의 일상이라도 안온하게 지키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그 마음은 너무나도 이해가 가고, 저도 때론 그렇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직업이 이런지라^^; 또… 뭐랄까, 권력자와 가해자들이 가장 바라는 게 ‘모두의 무관심과 방치’ 아닐까 싶어, “아니, 난 끝까지 눈 부릅뜨고 너희들이 망할 때까지 계속 욕할 거야!” 오기 같은 게 생기곤 합니다. 


어쩌면 전 아직 살만한 상태라 그런지도 몰라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살만하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삶에 여유가 없다며 절망과 무기력을 호소하는데, 저는 속으로 ‘난 절망과 무기력에 빠질 여유가 없어’라고 생각하거든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성폭력에 반대하면 “너 페미냐”며 입을 닥치게 하고, 나도 모르게 포르노 캐릭터가 될까 봐 SNS 사진을 스스로 삭제해야 하는 이런 세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얼굴과 목소리, 그러니까 내 ‘존재’를 알아서 지우도록 조장하는 건 그저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살라’는 이야기 아닌가요. 미소지니스트와 성폭력 가해자들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놔두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분노와 의지만으로 버티기엔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매일 한숨이 나옵니다. 마침 지난 편지에 소라도 “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길 꺼내 전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그쵸, 살고 싶지 않은 것과 죽고 싶은 건 좀 다르게 들려요. 사실 전 그 질문, “왜 살아야 하나?”를 어린이일 때부터 품고 살아왔어요.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삶의 목적과 이유를 찾는 것을 넘어, 저는 “죽고 싶다”는 마음도 청소년기 때부터 품어왔습니다. 인생은 기쁨과 행복보다 온통 아픔과 고통으로 넘실거리는 곳인 것 같고, 사람이 싫고, 미래는 두렵고, 나 자신 역시 데리고 살기가 버거웠습니다. 목숨은 내 것인데 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나? 전 살면서 자주, 죽음의 방법과 장소를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의 죽음을 가장 먼저 막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죠. 몸 어딘가 아프면 병원에 가 치료를 받고, 자살충동이 심해지면 비싼 돈을 주고 상담치료를 받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나아지고 평온함을 되찾으면 또 사느라 바쁜 날을 보내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멀어지곤 했어요. ‘지금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죽을 때가 아니다.’ 얼마 전엔 문득 이런 생각을 하다 혼자 웃음이 났다니까요. 이 얼마나 한국인 같은 정서입니까. 바빠서 죽을 여유가 없다니! 진짜 아직 “살만한가” 봅니다. 저는 혹시 무의식적으로 삶에 어떤 기대나 희망을 품고 있는 걸까요? 삶이 주는 것이 많을 때 죽음을 미루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삶에서 내가 무엇을 ‘받’고 있는지 감각하려면 정말 그것이 ‘내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내 삶’을 빼앗기는 걸 가장 못 견디는 사람 같습니다. 누군가 나의 시간, 나의 계획, 나의 중요한 무엇- 그러니까 ‘내가 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그에 대해 훈계하면 상대를 불문하고 당장 “네가 뭔데?” 소리부터 나오기 십상이거든요. 그래서 성범죄를 예방한다는 이유로 여성청소년들에게 온라인에서 사진을 지워라, SNS를 막아라, 그런 지침을 내리는 현실에 분노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내 삶’이 없는 세상이 과연 여자아이들을, 또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 애당초 왜 우리가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그것부터 질문하지 않고는 ‘내 삶’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지난봄 서울로 성평등 교육 연수를 받으러 갔을 때 첫날 토론에서 전체 참여자들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성평등한 세상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아니다/모르겠다 중 하나를 골라 그 자리에 서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활동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다’와 ‘모르겠다’로 몰린 사이 전 듣자마자 ‘그렇다’의 맨 끝 그러니까 ‘매우 그렇다’ 자리에 섰습니다. 그럴법한 이유를 생각하지도 않고 제 몸이 그렇게 휙 움직여버려 스스로 좀 놀랐어요. 자타공인 부정적, 비관적이라는 말을 평생 들어온 제가 말이죠. ‘난 이게 정말 간절하구나’ 그건 알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증거가 있어야 빚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의 존재를 많은 사람들이 의지하듯 말이에요. 위의 명제를 들었을 때 저는 페미니즘 활동과 젠더교육을 해온 제 지난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과연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내가 온갖 비난, 협박, 증오 속에서 그 고생을 해가며 계속 해왔을까? 언젠가 천지개벽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히고 완벽한 천국이 도래할 거라는 믿음이 아니라, 그냥 지금 뭐라도 하는 나 자신을 믿어주는 것, 저는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뭐라도 할 때 같이 하는 사람이 주변에 한 명이라도 있었던 것, 그게 저에게는 늘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았습니다. 


소라가 지난 편지에 “우리 꺾여도 다시 사랑을 되찾자” 말한 것처럼요. 수업시간에 제가 가끔 하는 말이 있어요. 보통 내가 보기에 비정상적이라, 내 상식이나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 혐오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들을 이해해서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나와 달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해는 사랑보다 더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이 끝까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하니까. 그럼 우린 그냥 인정해 버리고 계속 사랑한다. 


전 이제 왜 사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속 질문하고 있어요. 우리를 아무리 꺾어도, 입을 막고 얼굴을 지워도, 이 사랑과 믿음을 뺏을 수는 없을 겁니다. 사랑을 믿는 소라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에 저는 여전히 ‘매우 그렇다’에서 동지들을 기다리겠습니다. 



꺾이지 않는 더위의 9월 지리산에서

달리 드림 

*이미지 설명: 살롱드마고 글쓰기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쓴 "딥페이크, 디지털 성범죄 피해 생존자를 위한 메시지" 

- 인스타그램 @voice.for.survivors '생존자를 위한 목소리 수집처'에 게시 및 공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