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고 슬픈 일들에 기꺼이 꺾여서 다시 사랑을 되찾아요.
달리에게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그토록 무덥던 여름이 거짓말처럼 한풀 기세가 꺾여 변하는 걸 보면 자연은 놀랍습니다. 서울에 사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좀 그러네요.^^ 그래도 서울이든 지리산 자락이든 자연은 늘 제 할 일을 멈추지 않고 해내고 있으니 그 성실함이 정말 경이롭습니다. 그런데 저는 달라 편지를 늦게 보내고 말았네요. 사나운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흉흉한 소식들 때문인지 차분하게 글을 쓸 염이 나지 않더라고요. 물론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이긴 합니다.
지금의 이 절망스런 상황은 예견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계 최대의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하던 손정우의 미국송환을 기각한 나라니까요. 가해자에게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의 존엄과 생명은 늘 뒷전이란 걸 확인해 줬으니까요. 매일매일 전남편과 전애인, 아니면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들에게 여성이 살해되는 나라,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에 문제를 제기하면 젠더갈등을 부추긴다고 하는 사회, 남성이 곁의 여성을 성착취 범죄의 제물로 삼고 그걸 유희라고 여기는 사회.
다크웹이니 텔레그램이니 사실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도 잘 모르는 그 세계, 여성을 짓밟고 유린하는 것이 놀이인 그 세계의 가입자가 22만 명이라니. 쌍욕이 먼저 나왔어요.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22만 명의 집계 방식은 문제가 있다느니, 22만 명이 모두 한국인이 아니라느니 하며 언제나 그렇듯이 물 타기를 하더라고요.
22만 명이 아니라 22명이면 문제가 아닌가요?
현실의 여러 이슈에 거리를 둔 채 지내는 저도 이런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분노가 일고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이 일을 조롱하고 축소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나마 바닥에 남아있던 사랑이라든가 신뢰의 마음은 더 쪼그라듭니다.
이 보도를 접했을 때 달리를 생각했어요. 청소년을 만나 성 인권 강의를 하는 달리는 그저 분노와 쌍욕을 쏟아내는 저와는 다르게 더 복잡하고 참담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젠더 폭력은 피해자뿐 아니라 그 피해자 곁에서 함께 싸우고 연대하는 활동가에게도 타격과 상처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더욱 ‘차별하지 않으면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라는 달리의 글을 떠올렸어요. 피상적인 분노보다 그래도 사랑을 말하는 달리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힘을 느꼈습니다. 왜 사랑은 항상 싸우고 상처받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걸까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제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요. 저는 사실 그리 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죽고 싶다와 다른 말인데요, 제 삶이 불행해서도 아니고 엄청나게 괴로워서도 아니에요. 반드시 꼭 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여성학자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나만 이상하고 우울한, 정신적인 증후가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어서 조금 위로가 되었어요.
사실은 달라 편지에 저는 이 말을 가장 쓰고 싶었는지 몰라요. 삶은 아주 가끔 그런대로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더 자주 지루하거나 지긋지긋하거나 볼썽사나워요.
그런데도 (살고 싶지 않은) 저는 사소한 일에 분개하고 나의 불이익에도 분노하지만 남의 일에도 분노하며 가까운 사람의 슬픔에 같이 울기도 합니다. 분노와 슬픔의 쌍곡선 속에서 나와 타인을 연민하느라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는 것을 잊기도 해요.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저는 가까이서 봐도 희극 같아요.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저는 이 같은 분노와 슬픔 때문에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역시 참 이상한 일이에요. 내 일 같지 않은 세상일에 분노하고 남의 사정에 슬퍼하느라 밑바닥의 사랑이 다시 차오르니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 분노하고 슬픈 일들에 기꺼이 꺾여서 다시 사랑을 되찾아요.
한때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 말에 좀 반감이 있었는데요. 한 번도 꺾여보지 않은 마음이 뭘 알겠어요? 그래서 중요한 건 꺾여도 괜찮은 마음이에요. 그리고 살고 싶지 않아도 의미 같은 거 찾지 말고 살아내는 마음이란 생각도 듭니다.
저는 ‘서로의 질문에 대답이 되어’라는 2019년 여성인권영화제의 슬로건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질문을 던지고 문제제기를 해도 답이 없는 세상에서 연대하는 여성들이 서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냥 알 거 같아서, 내 질문에 답해줄 이들이 있다는 어떤 연결감 때문인 거 같아요.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울컥하고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저는 T처럼 보여도 대문자 F가 맞는 거 같아요.^^
사실 이번 편지는 사랑만 주고 떠난 존재에 대해서, 이별과 애도에 대해서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노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게 하지 않네요. 그래서 (변명을 한 번 더 하자면) 어떻게 써야 할지 시간이 더 걸린 거 같기도 합니다.
가끔 들여다보는 달리의 sns는 여러 활동들로 분주해 보입니다. 휴가가 끝나자마자 세상은 쉴 틈을 주지 않는 거 같아요. 바쁜 활동 속에 마음과 몸의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요. 멀리 있지만 늘 달리와 달리 동료들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가을 초입에 소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