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용한 언니 Nov 20. 2024

일하는 여자, 예술 하는 여자

시장의 이름표가 없는 노동

  2월 마지막 날, 함께 사는 동생이 코로나로 확진됐다. 허겁지겁 현관부터 집안 방문과 문고리들을 소독하고 화장실이 딸린 안방으로 동생이 들어갔다. 집에는 나 외에도 기저질환이 있는 일흔아홉의 엄마와 여든넷의 아빠가 있다. 게다가 엄마는 백신접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열흘 가까이 매일 아침저녁 청소와 환기, 소독을 하고 동생이 사용한 식기를 따로 세척, 소독했다. 다들 종일 집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손을 씻었다. 증상이 경미한 환자보다 연로한 엄마와 아빠가 더 걱정됐다. 직장에 나갈 일이 없는 프리랜서, 작가라곤 하나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남들은 노는 사람으로 여기는 내가 자잘하고 소소한 소통과 집안일을 했다. 좁은 집 안에서 4인이 함께 하는 시간은 온통 가사, 돌봄, 감정 노동의 연속이었다. 집안일이라 부르는 가사노동, 여성의 재생산 노동의 특징은 시작도 없고 그래서 끝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에서 논다,라고 쉽게 말한다. 시장의 이름표가 없는 노동은 노동이 아닌 것이다. 


 내가 아는 동갑의 여성작가는 이혼 후 혼자 살다가 아버지가 쓰러지자 원가족의 집으로 들어갔다. 원가족 이라곤 하나 이젠 늙은 부모만이 사는 집에 독신의 막내딸이 아픈 부모를 간병하고 집안을 돌보기 위해 들어간 것이다. 떨어져 살다 다시 만난 늙은 부모를 돌보는 것은 몸보단 감정적으로 소진되어 일이어서 안에서 하는 일 밖에서 돈 받고 하자 싶어 그 작가는 일 년 동안 청소 노동자로 살았다. 가끔 나도 생각한다. 계속 벌이가 시원찮다면 청소노동이든 요양보호사든 일을 찾아야 할까? 절대 그 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중년여성에게 열린 일자리는 청소노동이거나 식당서빙, 장애인이나 노인을 돌보는 노동이 유일해서다. 내가 아는 작가처럼 일 년만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더 길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일생을 돌봄 노동자로 지내며 예술을 했다. 


 비비안 마이어(1926-2009)라는 여자가 있다. 프랑스 출신의 미국인이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중상류층의 입주 보모, 가사 노동자, 노인 간병인이었고 그리고 사진가였다. 이십 세기 초반에 태어나 이십일 세기를 넘겨 사는 동안 비비안 마이어가 예술가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름을 보관하던 창고의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경매로 나온 필름상자를 호기심 많은 청년이 구매하기 전까지 비비안 마이어는 별나고 괴팍한 프랑스어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하층계급 여성이었다. 2008년 크리스마스 무렵 거리에서 넘어져 크게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음식을 거부하다 요양원으로 옮겨져 이듬해에 죽었다. 

 20세기 초중반 뉴욕과 시카고의 거리, 도시 골목골목 다양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은 아름답고 익살스러우며 삶과 일상 이면의 우수와 찰나의 기쁨, 아이러니를 포착했다. 그녀는 주중 일하는 틈틈이 사진을 찍었고 쉬는 주말에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목에는 늘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키가 몹시 컸던 비비안 마이어의 외양은 어딜 가나 눈에 띄었지만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닌 그녀를 기억하는 고용주는 거의 없었다. 누구 한 사람 비비안 마이어가 사진을 찍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고용한 보모가 감히 예술을 한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우아하고 점잖은 백인 중산층인 그들에게 비비안 마이어는 그저 아이를 봐주는 키 크고 괴상한, 고독하고 가난한 여성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고용주가 아이를 입양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비비안 마이어는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면 차라리 절 돌봐주는 게 어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이 비빌 언덕이라곤 하나 없던 비비안 마이어는 많은 아이들과 아픈 부자노인들을 돌봤고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글이나 기록물이 거의 없어 오직 사진만으로 비비안 마이어를 유추해 볼 뿐이다. 세계의 유명 갤러리들은 신비한 보모, 은둔자, 비밀스런 사진가로 비비안 마이어를 소개한다. 이 낭만적인 소개는 비비안 마이어가 돌봄 노동자란 사실을 예술을 치장하는 장식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근현대 여성 예술가들은 거의 중산층의 딸들이었고 예술사는 그 중산층의 딸들에게만 선심 쓰듯 겨우 몇 줄을 할애했다. 세상은 하층계급의 여성이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시각으로 창조적인 행위를 한다는 걸 잘 상상하지 못한다. 이런 인식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먹고 살만 한 집안의 여식들이 선택하는 별 쓸모없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다. 또 동시에 돈도 쌀도 되지 못하는 예술을 가난한 여성이 할 때 쏟아지는 조롱들이 있다. 별 쓸모없는 예술은 밥이 되지 않지만 인간을 성찰하게 한다. 여성들이 하루 종일 가동하는 재생산 노동 없인 세계가 돌아가지 않듯 밥도 나오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예술 덕분에 인간은 무쓸모의 인간다움을 찾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