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있든 없든 괜찮을 것이다
Dear. 소라
‘힘을 내서 살아야 한다.’
오늘 강의가 끝나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려는데 왜인지 불쑥 눈물이 났어요. 어디서 피어오르는지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순식간에 몸 전체의 혈류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놈의 끈덕지게 질긴 우울함. 혹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우울 DNA를 갖고 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사무실로 복귀해 처리할 일들이 산재해 있었기에 맘 놓고 울 수만은 없었어요. 나오다 만 눈물을 손등으로 슥 닦고 저는 다시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와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순간의 저는 마치 변신에 능한 트랜스포머 같아요. 그런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말소리, ‘힘을 내서 살아야 해.’ 그 순간이나 글을 쓰는 지금이나 저는 정말 힘이 없어요. 속삭임이 어떤 힘을 말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힘이라는 걸 팍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나’를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건 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해요.
나를 데리고 사는 게 한없이 무겁고 외롭고 어렵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모든 걸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과 모든 걸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줄다리기하듯 팽팽하게 대결합니다. 그 가운데서 저는 양쪽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왜 중간은 없을까 아니 왜 중간을 선택할 수 없을까. 내 인생인데 어쩌면 이렇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냐. 세상에 마음에 드는 인간은 또 왜 이리 없는 것이냐. 속으로 툴툴거리며 운전했습니다. 부러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시끄러운 내 마음에 응답하려 했어요. 하지만 음악을 끄고 나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시 고요가 찾아오고 저는 또 어찌할 수 없는 나와 둘이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나에게서)도망치고 싶다.’ 나도 모르게 올라온 마음의 소리에 저는 흠칫 놀랍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저에게 당황스러운 일이자 큰 고통입니다. 대학 때 많이 아파 2년 가까이 휴학했을 때 매일 글을 끼적거렸기에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어요. 인생에서 무엇도 가능하지 않을 때마다 글쓰기는 내가 살아있음을, 뭐라도 ‘할’ 수 있음을 확인케 해주는 거의 유일한 행위였습니다.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글은 세상에 나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소중한 창구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 가을 들어서부터 도무지 글을 쓰기가 힘들었어요. 그냥 싫다, 귀찮다, 힘들다는 것과는 다른 어떤 저항감이었습니다. ‘글을 쓸 수가 없다.’ 이것을 깨닫자 저는 갈 곳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을 쓸 수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글을 쓰기 시작하면 진창에 빠져버린 나의 꼴을 다 봐줘야 할 것만 같아서. 내가 다 끝내지 못한 울음소리를 들어줘야 할 것 같아서. 그 울음이 나를 더 진창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아서. 진짜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은 심정을 결국엔 들킬 것만 같아서. 무너지고 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지 않구나, 라는 생각에 미치자 저는 우울 앞에 속절없이 두 손을 들어버렸습니다.
그동안 저는 주로 ‘일’로 도망쳐왔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제게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일을 좋아해서, 일이 재미있어서, 먹고 사느라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답하곤 했습니다. 사실은 전 일 말고는 할 게 없었습니다. 그 빈곤함을 말할 수도 없고 들키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2년 전 번아웃을 겪으며 처음으로 일을 하기가 싫어졌습니다.(제가 일이 처음으로 싫어졌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일은 원래 하기 싫은 거 아니야?”라며) 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아니 일을 할수록 텅 빈 나를 본다. 번아웃은 제 마음을 휘몰아치게 하며 저를 계속 흔들었고, 결국 돌이 되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무기력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저는 매일 꾸역꾸역 맡은 일을 해낼뿐 아니라 계속 새로운 일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의 무기력을 눈치챌 수 없었을 거예요.
유리에 한 번 금이 가면 계속 더 많은 금이 생기듯 균형을 잃은 일상은 기우뚱거리며 겨우겨우 이어지는 형편이었습니다. 식욕을 잃어서 띄엄띄엄 굶고, 막상 먹으면 자주 체하고, 때로 이유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몇 달씩 잠이 안 오고... 그런 상태를 저는 그냥 피곤해서겠지, 노화겠거니, 하루하루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삶에서 기본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 상태를 증상이나 위험신호로 보지 않았어요. 스스로에 무관심했던 걸까요? 아니면 문제를 끝내 회피했던 걸까요? 1년이 넘어가도록 이렇게나 둔할 수가, 이렇게나 방치할 수가. 내 상태를 알아주고 나서야 체기가 사라지고 잠이 오기 시작하며 저는 무의식과 몸의 무서운 연결성에 새삼 놀라고 있어요.
오늘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에게 받은 소감을 보는데 “선생님이 친절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아, 나 오늘 기분 진짜 거지 같았는데, 말 안 듣는 애들 땜에 엄청 스트레스였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 웃으면서 애썼구나. 나의 트랜스포머 능력은 얼마나 프로페셔널하고 기만적인가. 이 소감을 보며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이런 나에 대해 딱하게 여겨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실 오늘 전 울기보다 소리를, 비명을 지르고 싶었어요. 어디서 어떻게 뭐라 질러야 할지 몰라 차마 하지 못했지만요. 어쩌면 꾹꾹 누른 비명의 아주 일부를 이 글에 담아 띄우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직 충분하진 않지만, 이제 조금씩 비명 지르는 법을 연습해보려 합니다.
글을 못 쓰겠다고 연락한 저에게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현명한 상담을 해준 소라 덕분에, 기운을 얻어 이 편지를 쓰게 되었어요. 못나고 지질한 모습이라 부끄럽기만 한 나를 덤덤히 보여주고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입니다. 글을 쓰고 나니 ‘힘을 내서 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이 있든 없든 괜찮을 것이다’로 바뀌었습니다.
비명의 겨울을 기다리며
달리 보냄
*첨부한 노래는 Red hot chili peppers의 “Give it away”입니다.
https://youtu.be/2Wx_UG_UjTY?si=qRJoKq6YneAvAQ3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