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효율을 추구하는만큼, 인간이 따스함을 추구한다면
강남에서 미팅이 끝나고 나니 타는 듯한 갈증이 몰려왔다. 길어진 미팅 탓에 몇 시간 동안 물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톡 쏘는 탄산수 한 병이 간절했다. 마침 눈 앞에 편의점이 보여 빠른 속도로 달려가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점프하듯이 문에 몸을 던졌다.
‘덜컹’ 예상과 달리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스러워하며 두리번거리니, ‘무인 편의점’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뻘쭘한 몸짓으로 신용카드를 주섬주섬 꺼내 카드 기계에 인증하고 나서야, 편의점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무인 편의점 내부는 계산대에 사람이 없다는 것 빼고는 일반 편의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곧장 음료 코너로 직진하여 맨날 마시던 탄산수 하나를 집어 들었다. ‘1+1’ 행사 중이었다. 신나서 한 병 더 집으려고 했는데, 어라, 휑하니 그 뒤에 아무것도 집히는 게 없었다.
‘하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알바생이 있었다면 창고에 재고가 있는지 주저 없이 물어봤을 것이다. 고객센터 전화번호가 벽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누군가 재고를 확인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담당자가 와서 창고에서 제품을 꺼내 주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해 보는 기분을 느끼면서 ‘1+1’ 행사 중인 제품을 한 개만 가져가고 싶지도 않았다. 탄산수를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집 근처 편의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갈증은 참고 참았다가 해소하는 게 쾌감이 극에 달하는 법이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여기서 집까지 네 정거장만 더 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들어올 때에 비해 현저히 느린 속도로 편의점을 걸어 나가는데, 담배 자판기 키오스크 앞에서 한 아저씨가 조금 헤매고 있었다. 언뜻 보니 신분증도 스캔해야 하고, 지문도 인증해야 하는 등 절차가 꽤 복잡한 모양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제를 마친 아저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휴 겨우 샀네.’ 하고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작년에 공항 셀프 체크인 키오스크에서 내게 티켓 발권을 부탁했던 할머니 한 분과 묘하게 겹쳤다. 바로 옆 셀프 계산대에서는 20대 또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능숙하게 계산을 하며 멤버십 카드로 할인까지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지만 ‘뭐, 곧 익숙해지겠지. 편리한 세상이니까.’ 하며 무심한 척 돌아 나왔다.
“어머, 오셨어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동네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밝은 에너지가 나를 덮쳤다. J는 김밥 매대의 물품을 채워 넣다 말고 뒤돌아서 내게 환하게 인사했다. 나도 가벼운 눈인사로 답했다. 자취 4년 차쯤 되면 하루에 한 끼 정도는 편의점에서 때우기 마련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편의점을 들락거리다 보니, 3개월 전쯤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 J와 안면을 트고 인사할 정도는 되었다. 목표로 했던 탄산수는 보기 좋게 매대에 가득 차있었다. 그중 두 병을 의기양양하게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자주 드시던 요거트도 이번 달에 1+1 됐어요.”
“아, 그럼 같이 사야겠네요.”
내 동생 또래쯤 되었을까, J에게는 이렇듯 과하지 않은 친절함이 있어서 좋았다. 사실 동일 브랜드의 좀 더 규모가 큰 편의점이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이 편의점만 찾게 되었다. J가 행사 상품 정보를 조곤조곤 알려주는 탓도 있었지만, 평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데 누군가 명랑한 목소리로 나를 맞아주면 어쩐지 기분이 조금 쾌활해지기 때문이었다. J의 시급에 그런 명랑함까지 계산된 건 아닐 텐데도, J는 열심이었다.
예정에 없던 요거트까지 욕심껏 두 개 손에 쥐고 다시 계산대로 돌아왔다. 계산대 아래로 언뜻 형형색색 밑줄이 그어진 책과 필기구, 그리고 태블릿 PC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J는 아마 취업준비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공부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그래도 알바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게 어디예요. 주말에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는데 거긴 어림도 없어요.”
J는 씩씩하게 웃으며, ‘봉투 필요하시죠?’라고 묻고는 탄산수 두 병과 요거트 두 개를 봉투에 친절히 담아주었다. 나의 대학 시절이 떠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익살스럽게 ‘파이팅하세요!’를 외치니, J가 입을 가리고 깔깔 웃으며 카드를 돌려주었다. 마음이 조금 훈훈하게 데워진 채로 편의점을 나왔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하는 맑은 목소리가 내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편의점 앞은 한산했다. 생각해보니 이 편의점은 퇴근 시간 이후에 사람이 많이 없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J가 키오스크로 대체될 가능성도 있는 걸까. 아까 다녀왔던 무인 편의점이 떠올랐다. 또 치솟는 인건비와 코로나 19로 인한 ‘언택트’의 물결을 타고 키오스크가 예상보다 빨리 보편화되고 있다는 뉴스를 본 것도 기억이 났다. 나는 그제야 내가 자주 다니는 타코 전문점에도, 분식집에도, 패스트푸드점에도 언제부터인가 키오스크가 주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틈틈이 공부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사라지면 J는 어디로 가게 될까. 기술의 발달로 없어지는 직업도 많지만, 새로 생기는 직업의 수도 꽤 많다고 들었다. 드론 조종사나 AI 연구원 또는 블록체인 개발자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없어지게 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새로 생기는 직업으로 옮겨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왠지 모르게 쓸쓸한 마음이 들어, 뮤직앱에서 퇴근길 추천 음악 하나를 재생했다. 마음에 드는 알앤비가 흘러나왔다.
‘이 와중에 AI 음악 추천이 기가 막히는구만.’
IT회사를 꽤 오래 다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하는지, 또 그들이 최대의 효율을 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이미 우리가 기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조금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키오스크 앞에서 주눅 드는 사람이 없기를, 또 누군가 하루아침에 알바 자리를 잃고 황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J의 쾌활함처럼 사람만이 가지는 고유한 영역이 존중받으면서 오래오래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AI 음악 추천이 아무리 좋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추천해 주는 음악이 마음에 더 와 닿듯이, 인공지능 스피커가 아무리 똑똑해도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이 훨씬 즐겁듯이, 로봇 청소기가 아무리 야무져도 사람이 하는 집안일이 절대 평가절하되지 않듯이, 그렇게 기술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기술이 효율을 추구하는 만큼, 인간이 집요하게 따스함을 추구한다면 기술과 인간은 자연스럽게 얽힐 수 있을 것이다.
J가 건네준 봉투 속의 탄산수 하나를 꺼내 마셨다. 톡 쏘는 탄산이 경쾌하게 목을 때리면서 그제야 하루의 갈증이 씻겨 내려갔다.
* 서울국제도서전 X 카카오브런치 <XYZ:얽힘> 공모전에 당선된 글입니다.
(본문의 사진은 내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