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하늘길이 열리고 처음 맞는 2023년 설을 친한 친구의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옆나라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호치민 국제공항은 시내와 맞닿아 있어서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 복작복작한 도심 바로 위를 가까이 비행한다. 오랜만에 하는 베트남 여행을 앞두고 설레여서 그랬는지, 빌딩 모서리에 비행기가 부딪힐까 무서워서 그랬는지. 심장이 두근두근 오금이 저린 느낌을 받았다.
방콕에서 호치민으로 날아가는 길. 기내식으로 간단한 샌드위치가 나오는 짧은 비행이었다.
베트남계 이민 2세인 내 친구는 베트남에 있는 친척들과 조금 독특한 다이내믹을 가지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인 그는 베트남어로 가족과 대화를 나눌 때 대략 오고 가는 말들의 6-70%를 이해한다고 했다. 때문에 의사소통이 매끄럽지 않지만, 오히려 그 관계는 나와 내 친적들 사이보다 더 가깝고 살갑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친척들 일에 무심한 것은 십 대 시절부터 쭈욱 해외생활을 했기 때문이라는 허술하고 구차한 변명이 이 친구의 케이스를 등에 업고 완전히 힘을 잃을 정도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친구의 일가친척 수십 명을 만나기 전 내가 한 준비는 단 세가지로 간단했다. 진심을 담은 미소와 예의를 장착할 것. 아이러닉하게도 태국에서 가져가는 한국산 선물들. 그리고 듀오링고 앱으로 3주간 속성으로 공부한 기본 베트남어.
도착 후 첫 끼니는 시내 유명한 쌀국수 집에서. 손수 라임을 짜주시는 세심한 아버님의 손.
베트남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음력설을 쇤다. 베트남어로 설은 Tết (떳) 이라고 불린다. 베트남인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크고 중요한 명절인데, 국가 공휴일이 음력설 하루 전날부터 시작해서 주말을 끼고 일주일 이상 이어질 정도다.
베트남 사람들은 설날로 넘어가는 자정에 조상님들의 영을 집안으로 불러들이는 의식으로 향을 피우고 기도를 드린다. 내가 도착한 날이 마침 설날 바로 전날이었기 때문에 늦은 밤에 외갓집으로 향했다. 집안에 마련된 제단 앞에서 향을 손에 꼭 쥐고 조상님들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기도를 드렸다. '이 집안에 드나드는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해 주세요.'
그러고 나서는 처음 뵙는 집안 어른들과 사촌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반갑게 맞아주셨고 나는 속성으로 배운 짧은 베트남어를 머리에서 쥐어짜 내 인사하느라 바빴다.
왼쪽: 외갓집에서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멍멍이 메시. 오른쪽: 제단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나와 친구 형제.
그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다시 외갓집으로 향해 친척들과 한 자리에 모여 리씨 (li xi)를 주고받는 행사를 치렀다. 우리나라 세뱃돈과 비슷한 개념인데, 새해의 행운을 비는 의미로 빨간 봉투에 너무 크지 않은 액수의 용돈을 담아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는 베트남 설날의 중요한 풍습이다.
어른들께 받은 리씨 봉투들
사람들은 리씨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몇 가지 덕담을 건넨다. 부, 학업, 커리어적 성공, 건강을 바라는 수많은 덕담들이 있다. 그중에 내가 달달달 외워서 전했던 덕담들로는 "쮹 믕 남 머이" (Chúc mừng Năm Mới, Happy New Year), "반 쓰 뉴 이" (Vạn sự như ý,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길), 그리고 "쩨 마이 콩 야" (trẻ mãi không già, 평생 늙지 않고 젊게 사시길) 등이 있었다.
한 번은 내 바로 다음 순서에 줄을 서서 삼촌과 외숙모에게 리씨를 받은 친구가 내가 말한 덕담들을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는 바람에 덕담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농담 섞인 핀잔을 듣기도 했다.
리씨를 나누기 전, 테이블에 놓여있던 여러 주전부리들
오전 행사가 끝나고, 가족들 모두 큰외삼촌 댁에 모였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명절음식으로 배불리 식사를 했다.셰프인 큰 외사촌누나의 금손에서 탄생한 음식들. 그 어디에서 먹어본 베트남 음식보다 신선하고 맛있었다.
친척 어르신께서 돼지고기 다리 부위로 만들어 보내주신 수제 햄. 정말 고소하고 쫄깃했다.
상큼한 샐러드와 달콤 짭짜름한 소스룰 묻혀 구운 돼지고기 꼬치 요리
샐러드, 베트남식 소시지, 그리고 바삭촉촉했던 스프링롤
반쯍 (Bánh chưng) - 찹쌀밥 안에 녹두와 돼지고기를 넣고 바나나잎에 싸 쪄내는 베트남 설 대표 음식이다.
우리나라 장조림과 비슷한 돼지고기와 달걀을 함께 조린 음식 역시 베트남 설의 특별 메뉴라고 한다.
설 둘째 날에는 친가 친척 집에 방문했다.
도착하자마자 부엌에서 바쁘게 저녁식사를 준비하시는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덕담과 함께 리씨를 주고받았다.
친가 친척 집 설날 장식. 베트남에서는 설에 노란 꽃으로 집을 장식한다. 살구꽃, 국화 등이 주로 쓰인다.
저녁 식사는 구운 오리고기, 삶은 닭고기, 돼지고기 조림, 돼지고기 바베큐 등등 온갖 종류의 육류 요리와 신선한 허브 및 절임채소들로 한상 가득 차려주셨다. 심지어 지인에게서 구매하셨다는 김치도 내어주셨다.
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에는 귀여운 조카들을 데리고 근처 한국 편의점 (GS25)에 가서 간식을 한 아름 사가지고 돌아와서 태블릿 PC로 한참 게임을 하며 놀았다. (간식플렉스는 내가 어른이 되면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것..)
베트남에서 나고 자란 어린 조카들이 너무나도 쉽게 나와 쉽게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며 나는 "역시 요즘 애들은 다르다"며 자꾸만 늙은이 같은 소릴 해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설 한 주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큰외삼촌 댁에서 친구네 가족을 한 번 더 초대해 주셨다. 첫날 뵙지 못한 작은삼촌과 사촌누님도 뵙고 인사드릴 겸.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 잔치..
셰프 사촌누님께서 또 한 번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음식들
다시 한 번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주말에는 외사촌 여동생과 함께 한국 음식을 먹으러 갔다. 영어를 잘해서 말이 잘 통하는데 한국어까지 잘하는 친구다. 한국 예능을 보면 자막 없이 반 이상을 알아듣는다고 했다. 왠지 더 마음이 가서 따로 한 번 보고 싶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던 중 서점에 들러서 나에게 한국어로 베트남어를 배울 수 있는 책과 시디를 선물해 줬다. 고3 수험생이라 바쁘고 생각도 많을 시기에 시간을 내준 것도 고마운데, 선물까지..
백종원님 식당인 본가 호치민점에서 부대찌개를 배불리 먹었다.
방콕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 날에는 동네 시장을 구경해보고 싶다는 말에 친구네 아버님께서 아침 일찍숙소 근처 시장에 데려가주셨다. 딱 내가 보고 싶던, 관광객 대상이 아닌 현지인들이 아침장을 보는 시장이었다.
티응예 (Thị Nghè) 시장 입구 전경
하늘이 맑고 날씨가 참 좋았다.
생화를 시장 곳곳에서 팔고있었다. 태국에서는 종교적 의식에 쓰이는 꽃을 주로 파는데, 베트남은 그냥 장식용 꽃들을 팔고 있었다. 어딘가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바나나잎에 싸서 쪄내는 베트남식 찹쌀떡 반잇 (bánh ít) 안에는 달달한 코코넛소 또는 녹두소가 들어있다.
요건 짭짤한 버전. 너무 커서 살 엄두가 안났다.
며칠 전 큰 아버님께서 맛보라고 가져다 주신반잇 (찹쌀떡 간식)이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날 시장을 걷다가 길 건너편에서 비슷한 걸 발견하자마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것이 먹고싶다 열정적으로 어필했다. 그러자 친구네 아버님께서 한걸음에 달려가 한 봉지 가득 사주셨다.
반잇을 한봉지 가득 구매중이신 아버님
베트남은 태국과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기후가 비슷해서인지 파는 과일 종류가 대부분 비슷하다. 그중에서 한 두 가지 처음 보는 과일들을 발견해서 시장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다양한 로즈애플을 판다.
처음 보는 과일이었다. 안은 하얀 과육에 생김새도 망고스틴이랑 비슷한데, 새콤함이 전혀 없고 오히려 단감에 가까운 맛이었다.
잭프룻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크기가 작은걸 보니 다른 과일이려나? 물어보지 못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