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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랑 Aug 21. 2024

드디어 수술

서른셋 어른이 망막박리 수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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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당일


아침 9시. 병원에 도착했다. 수술 병동은 내 부모님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4-50년대생 환자분들로 가득했다. 환자복을 입은 나를 보고 젊은 아가씨가 여기서 뭐 하냐고 묻는 환자분들도 있었다.


축복받은 건강 체질로 33년을 살아온 덕에 태어나 수술이라곤 사랑니 발치 말곤 받아본 적이 없었다. 수액도 물론 처음 맞아봤다. 왼쪽 손등에 먼저 바늘을 찔러 넣었는데 아파서 (당연히 아프겠지 쯧쯧) 움찔했다가 피가 줄줄 새고 멍이 들었다. 엄살보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애꿎은 오른쪽 손등마저 뚫리는 것이었다아악.

긴장감 넘치던 수술날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가만히 있다가 뚫려버린 오른쪽 손등.

오전 11시. 다정한 간호사님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실에 입장했다. 하지만 수술대에 오르니 몸이 경직됐다. 긴장한 채로 누워 있으니 집도의 선생님께서 심호흡을 크게 하라고 했다. 마취과 선생님들이 마취 잘해주실 거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과 함께. 잠시 뒤, 약냄새가 훅 올라오면서 잠들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기억이 끊겼다.


수술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전신마취에서 깨면서 내가 무슨 대단한 헛소리를 하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깊은 잠에서 깬 내 첫마디는 다행히 '오른쪽 눈이 너무 아파..'였다. 마치 다른 사람 입에서 튀어나온 말처럼, 내 귀에도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들렸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지금 오른쪽 눈 수술을 해서 아파요, 환자분. 조금만 참으세요.' 하고 내 마일드한 헛소리에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오후 3시. 마취가 풀리면서 눈알이 미세하게만 움직여도 크게 고통스러웠다. 마치 눈 안쪽에 작고 뾰족한 유리조각을 잔뜩 흩뿌려 넣어 놓은 느낌이었다. 화장실에 갈 땐 최대한 눈알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걸으려고 애써봤지만 하등 의미 없는 노력이었다. 혹시 그거 아시나요? 인간이 걸어 다닐 때 자기 의지로 눈알을 고정할 수 없다는 사실. 예를 들어  앞 코너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몸이 돌기 2초 전쯤 눈알이 먼저 돌아간다! 나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렇게 요리조리 제멋대로 굴러가는 눈알의 모든 움직임이 통각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후 6시. 당일 퇴원 직전 집도의 선생님과 마지막 진료가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눈알이 맘대로 움직였고 통증이 심해 진료실로 향하는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거즈로 수술한 눈을 가리고서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느릿느릿 뻣뻣하게 걸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집도의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렇게 병자처럼 걷지 않으셔두 됩니다?

분명 그의 말 끝에 물음표가 찍혀있었다. 나는 졸지에 민망한 프랑켄슈타인이 됐다. 그것도 엄살이 엄청 심한. 하지만 차라리 저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였다. 아 별거 아니구나? 나 지금 병자 아니고, 그냥 눈 수술한 사람일 뿐. 금방 나을 건가 보다, 싶었다.

병자: 아 옙..


오후 7시. 집에 도착. 잔뜩 부어서 뜰 수도 없는 눈에 처음으로 안약을 넣었다. 그 직전 두려움은 과장을 조금 보태 수술하기 전보다 더했다.


오후 8시. 최대한 움직임을 줄이려 곧장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팟캐스트를 들으려고 해 보았는데, 세상에.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리만 듣는데도 눈알이 마구 혼자서 굴러갔다. 도저히 눈알을 내 의지대로 컨트롤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오디오를 들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났다. '수술하고 나면 팟캐스트나 주야장천 들어야지, 심심할 틈도 없겠네~'했던 나의 계획이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진짜 곤욕은 잠에 드는 순간이었다. 눈을 완전히 감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몰랐던 사실인데, 잠에 막 들려는 그 찰나의 순간에 눈알이 저 어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나고, 딱 그 타이밍에 수십 개의 바늘로 눈을 찌르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잠에 들려고 하면 아파서 깨고, 아파서 깨고, 그렇게 셀 수 없이 반복하다 지쳐 겨우 잠들었다.




수술 후 일주일


수술 다음 날. 회복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다녀왔다. 생각보다 물이 더 많이 빠졌다고 말씀해 주셨다. 기쁜 소식이었지만 그걸로 안심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회복하는데 집중하겠다고 다짐했다. 만약에 지금부터 일주일을 허튼짓하지 않고 오로지 쉬는 데에만 집중함으로써 재수술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미래에 두세 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과 수고를 아낄 수 있다면, 아주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병원에서 거즈를 떼 줬지만 수술한 눈을 뜨면 계속 눈물이 줄줄 나와서 눈을 편히 뜨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게 가장 편했다. 다행스럽게도 벌써 오디오는 큰 통증 없이 들을 수 있었다. 하루 세 번 식사와 함께 약을 먹고, 하루 네 번 안약을 넣는 순간 외에는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고 팟캐스트와 오디오북을 듣는 생활이 시작됐다.


엄마는 자꾸 내 눈을 보면서 '생각보다 많이 안 빨갛다, 안 부었다'같은 말을 해줬다. 쫄보인 나는 무서워서 내 눈을 거울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냥 잠자코 엄마 말을 믿기로 했다. 나를 낳고 길러준 사람인데,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 통증은 첫날보다 조금 잦아들었다.

엄마가 보기에는 하나도 부어있지 않았던 내 눈


수술 후 4일째부터는 한 1분 정도는 눈을 뜨고 있을 수 있었다. 통증도 꽤 많이 줄어들었다. 수술하고 나서 1-2주간은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병원에서 머리를 감지 말라고 했는데, 도저히 머리가 가려워서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4일째 되는 날 엄마 아빠가 머리를 감겨 주시기로 했다.

머리를 감지 못하니 머리를 빗으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나왔다.

엄마 아빠는 내가 방에서 쉬고 있는 동안 부엌 싱크대를 미용실 싱크대처럼 준비해 놓으셨다. 내가 이쪽을 더 씻어 주세요, 목이 아파요, 눈에 물이 튈 것 같아요, 하면서 귀찮게 하는데도 조금도 다그치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셨다. 서른세 살 먹고 다시 엄마 아빠의 아기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맛있는 김치찜을 해 주셨다. 등갈비 김치찜. 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맛. 엄마 아빠의 보살핌으로 매일매일 아픈 눈이 한 뼘씩 더 낫고 있었다.

엄마표 등갈비 김치찜으로 망막 건강이 +3 되었습니다

5일째에는 수술 후 시뻘겋던 눈에 흰자가 드디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통증도 눈을 감을 때 이물감도 덜해졌다. 모든 것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작은 회복의 신호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수술 후 2-3주 차


2주가 지나고 병원에 가서 실밥을 풀었다. 나는 내 눈에 실밥이 있는 줄도 몰랐다.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곧바로 마취 안약을 넣고 작은 기구를 내 눈알에 대고 투둑투둑 뭘 끊어냈다. '방금 눈에 뭐 해주신 거냐'라고 물어서 실밥이 있었다가 (?) 없어졌다 (!)사실을 알았다. 실밥을 풀고 나니 눈에 이물감이 훨씬 더 줄어들면서 편해졌다.


3주 차에는 통증이 더 많이 잦아들었다. 빨갛다 못해 검붉었던 흰자도 거의 다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런데 수술을 하지 않은 눈에도 광시증이 생겼다. 혹시 왼쪽 눈에도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확인차 병원에 방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왼쪽 눈에도 망막에 구멍이 있었다. 다행히 박리가 진행된 상황은 아니라 예방 차원에서 레이저 치료를 했다. 그동안 말도 못 하고 힘들었을 내 눈에게 미안했다.




수술 후 4주 차


수술 후 한 달은 통째로 병가를 내고 쉬었다. 병가의 마지막 주가 되자 '지금 이 눈 상태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루 종일 모니터 들여다보는 일을 하는데, 지금은 10분만 쳐다보고 있어도 눈이 침침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스크린 밝기를 낮추고, 색상을 노랗게 바꾸니 그나마 괜찮아졌다. 하지만 통증과 뻑뻑함은 가시질 않았다. 진지하게 내 눈 건강을 위해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의사 선생님은 눈이 아픈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지금 내 눈은 수술이라는 큰 일을 겪었고, 그 티를 마구 낼 것이라고 했다. 만약 눈물약을 넣고 잠깐 쉬어서 가시는 통증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심한 통증이나, 시야가 안 보이기 시작하면 꼭 병원을 찾아오라고 했다. 내 눈은 잘 회복해 가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제 잘 지내다가 3개월 뒤에 보자고 하셨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서울 안과병원과 일산 안과병원에서 진료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동네 안과 선생님들을 찾아뵀다. 망막박리 진단을 받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 막막하던 에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수술 잘 받고 잘 회복하고 있다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

동네 안과 선생님들께 가져간 간식과 커피
내돈내산 잠깐 홍보: 일산의 명물 밤리샌드. 선물이 필요할 때 이만한게 없다. 귀엽고 맛도 있기 때문.




수술 두 달 차: 일상 복귀


수술 후 5주 째부터는 다시 재택근무 일을 시작했다. 근무 복귀 처음 일주일은 반차로. 그다음 주부터는 풀타임으로 근무했다. 눈물약을 달고 살아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스크린을 지속적으로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처음 10분에서 30분으로, 또 한 시간으로, 그렇게 점점 늘어갔다.


생활 반경은 여전히 집, 집 앞 산책로와 공원, 가끔 하는 외식 정도로 제한했다. 의사 선생님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제외하면 산책이나 달리기까지 해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재발위험이 있다니 불안해서 달리기는 포기했다. 달리기는 내 삶의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일단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며 낙심하지 말고 당장은 걷기를 열심히 하기로 한다.


방콕 산책을 잠시 멈추고, 일산 산책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중이다.




수술 세 달 차: 불안과의 싸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어려운 부분은 망막박리와 관련된 작은 증상에도 불안감이 증폭된다는 점이다. 재수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으니까. 내가 받은 수술은 눈에 장기적 후유증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공막돌륭술이다. 만약 재수술을 해야 한다면 유리체절제술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심한 후유증은 물론이고 눈에 가스를 주입하기 때문에 수술 후 엎드린 자세로 꼼짝없이 몇 주를 보내야 한다. 그러면 일을 못하는 건 당연하거니와 몇 달 동안은 비행기도 탈 수 없다. 언제 방콕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완전히 미지수가 되어버릴 거다.


망막박리의 대표 증상으로는 시야에 날파리 혹은 먼지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는 비문증이 있다. 망막박리 진단을 받기 몇 주 전 비문증이 확 늘었을 땐 뭔가 크게 달라진 것을 확실히 체감했다. 하지만 이미 셀 수 없이 너무 많은 실오라기들이 시야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지금은 이게 늘어난 건지 아닌지 확신하기 어렵다. 밝은 곳에 가면 비문증이 심하게 느껴지는데, 그때마다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에 휩싸인다.


눈앞에 번쩍이는 섬광이 보이는 광시증도 망막박리 증상 중 하나다. 수술 후 원래 있던 광시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전에는 없던 위치에도 광시증이 생겼고 두 달이 넘게 속됐다. 혹시 또 다른 부위에 박리가 생겼다는 신호는 아닐까, 혹은 수술 부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싶어 광시증이 보일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하다.


결국 세 달 뒤에 보자던 선생님의 작별인사를 거스르고 한 달 만에 다시 진료를 받으러 갔다. 주치의 선생님은 한 달 전 촬영한 내 망막 스캔과 현재 상태를 나란히 비교해 보여주며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회복하는 중임을 확인해 주었다. 고마운 내 눈은 오늘도 열심히 건강한 원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힘쓰고 있다. 나는 모두의 수고 덕분에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다. 그렇게 믿고 마음을 편히 가지려 노력하는 요즘이다.




더 많은 방콕살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sorang.di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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