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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 생에 첫 요가 수업

굳이, 집 밖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요가를, 왜?

by 소랑

나는 뭐든 혼자 하길 좋아하는 슈퍼 내향인이다. 태국 방콕에 수년째 면서 요가, 킥복싱, 주짓수 등 다양한 운동을 하러 다니는 게 취미라는 직장 동료들을 여럿 만났다. 사회성 좋은 그들이 같이 운동하러 가자고 할 때마다 내 반응은 한결같았다. '와 너는 쉬는 날 사람들이랑 운동을 하러 가는구나. 정말 멋지다. (거절.)' 에두른 거절의 표현이었지만 말 자체는 항상 진심이었다. 집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취미가 있다는 것이 참 좋아 보였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런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중에서도 요가는 '나도 한 번 해볼까?' 생각만 한 게 수십 번이었을 거다. 하지만 내가 결국 다다르는 결론은 매번 같았다.


요가는 집에서 영상 틀어놓고 혼자 해도 되잖아..?

콘도에 있는 피트니스 시설에 요가매트를 깔 자리는 충분하다. 아니, 그냥 내 방에다가 요가 매트를 깔아도 된다! 굳이 바쁜 하루를 쪼개 시간을 내서 수업시간에 맞춰 방콕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을 뚫고 정해진 장소까지 가야만 하는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 못하는 포즈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어색하게 몸을 구기지 않아도 된다. 역시 요가는 집에서 혼자 하는 게 최고다.


이 의식의 흐름의 단점은 명확하다. 혼자 하는 요가는 겨우 1주일 정도 꾸준히 하면 나름 오래 하는 것이라는 것. 30분짜리 영상을 틀어놓고는 중간에 지루해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어김없이 나는 다시 맨날 하던 운동만 (걷기, 달리기, 웨이트) 하는 예측 가능한 인간으로 남는다.


하지만 인생의 '노잼 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험에 삶을 내던져보기로 마음먹은 지금, 더 이상의 변명거리는 없었다. 드디어 생에 첫 요가 수업을 들어볼 타이밍이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잊고 있던 ClassPass라는 모바일앱을 다시 설치했다. 월간 구독결제 시스템으로 구매한 크레딧을 이용해 무에타이, 요가, 필라테스, 주짓수 등 다양한 운동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앱이다. ClassPass에 처음 가입하면 2주 무료체험 기간이 주어지는데, 이 기간 동안 33개의 무료 크레딧으로 원하는 수업을 들어볼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가입했다가 구독을 취소한 전적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앱을 재설치하니 무료체험이 다시 활성화됐다. 그렇게 새롭게 2주 무료체험 기간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 기분이었다.

태국 현지 ClassPass 유료 플랜은 22크레딧 (1,350밧, 약 5만 5천 원)부터 시작한다.
스파 & 뷰티 서비스와 특정 프리미엄 서비스들은 무료체험 기간 동안에는 제한된다.

먼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마음에 드는 요가 스튜디오를 찾았다. 처음 들어보는 요가 수업 이름들은 빈야사, 하타, 플로우, 등등으로 다양했고, 스케줄이 매일 다르게 짜여있었다. 그렇게 한 이틀을 수업 목록만 주야장천 들여다보면서 허비했다. 뻣뻣한 관절의 소유자인 내가 들어볼 만한 수업이 과연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수업 설명을 지나치게 꼼꼼히 읽었다. 처음 가보는 거니까 나에게 맞는 수업을 골라야 했다. 결코 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무료 체험 3일 차가 되었다. 이제는 진짜 수업을 들어봐야겠어. 그런데 웬걸. 하필 생리 시작 직전인 걸 몰랐다. 월경증후군은 만만한 친구가 아니다. 배도 아프고, 몸도 무겁고, 하체 관절이 저리기까지 해서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는 친구다. 첫 요가수업인데 불편한 상태로 가고 싶지 않았다. 또 핑계같이 들리지만, 절대 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게 또 어느새 1주일이 흘렀다.


결국 아직 요가 수업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로 무료체험기간 2주 중 딱 3일을 남겨둔 시점이 오고야 말았다. 현명한 소비자라면 무료로 수업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다음 본격적으로 결제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내일은 꼭 평소대로 아침 산책을 마친 다음에 바로 요가 수업을 들으러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수업을 미리 예약해 놓기에는 또 망설여졌다. ClassPass에는 수업 시작 12시간 이내에 예약을 취소하게 되면 수업료만큼의 금액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늦잠을 자서 수업에 못 가면 어떡하지? 그래, 수업을 듣지도 못하고 돈만 낼 수는 없지.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수업을 예약해야겠다. 그렇게 또 다음날의 나에게 책임을 미뤘다.


다음날 아침. 다행히 제시간에 일어났다. 하지만 잠이 덜 깬 상태의 내 정신은 나약했고 결국 본심을 드러냈다. 요가 수업에 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나를 또 설득하기 시작했다. 없는 의지를 쥐어짜 ClassPass 앱을 슬쩍 켜보았다. 어머나. 오늘 아침 9시 수업은 이미 수강생이 다 차서 예약을 할 수가 없네? 다음부터는 전날 저녁에 미리 예약을 해야겠다. 호호.


어라? 그 순간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 왜 수업에 못 가게 돼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거지? 너 이 자식, 요가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일단 평소대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 선선한 방콕의 겨울 (이지만 한국의 초여름 느낌 정도) 아침공기가 산뜻했다. 매일처럼 집 근처 공원을 여러 바퀴 돌고, 귀여운 고양이들이랑 한참 놀았다.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이 매우 익숙한 루틴이었다. 이렇게 수백 번도 더 돌려본 영화처럼 익숙한 하루 중에 '생에 첫 요가 수업을 간다'는 장면은 내 삶의 시나리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동네 공원에서 제일 귀여운 냥이. 그녀의 하루 루틴은 밥 먹기, 그루밍하기, 떡실신해 자기, 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루틴에 작은 틈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집 바로 앞에 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러보지 않은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주 사소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일 하나만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럼 요가 수업을 듣는 것도 별거 아닌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매일 그냥 지나치던 좁은 골목 안 카페로 들어가 제일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서 팟캐스트 한 편을 들으며 약 20분간 커피를 홀짝였다. 몇 달 전 눈 수술 이후 아침 공복에 커피를 마시는 일을 관뒀었는데, 방콕에서는 디카페인 커피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탈이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몸에 에너지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와 낯선 이들로 가득한 카페의 풍경이 썩 나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오늘 오후에 요가 수업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샘솟았다.

내 꽉 닫힌 일상에 작은 틈새를 열어준 빈티지 상점 겸 카페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곧바로 다시 집을 나섰다. 생에 첫 요가수업이었다.

생에 첫 요가 수업을 들었던 방콕의 한 요가 스튜디오


한 줄짜리 후기는 이렇다. '진작 갈걸!'


조금 더 길게 적자면, 이 날 이후로 '굳이, 집 밖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요가하러 가지 않을 이유'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집 근처 요가 스튜디오들을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 다녀보며 즐거운 요가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느낀 요가 수업의 장점들은 이렇다.

초보자 수업에 가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다. 혼자만 삐걱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혼자 좀 삐걱대면 어때? 대부분 본인 동작에 집중하느라 옆 사람이 얼마나 못하는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요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너그럽고, 친절하고, 젠틀하며, 인내심이 많은 운동인 것 같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각자 본인 페이스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여유공간을 주었다.

망막박리 수술 전에는 웨이트를 해야지만 근육 단련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요가로 생전 느껴보지 못한, 마치 온몸을 방망이로 두드려 맞은듯한, 전신 근육통을 경험했다.

요가 영상을 틀어놓고 혼자서 할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시간이 빨리 간다. '이제 한 30분 했으려나?' 하는 순간 한 시간짜리 수업이 끝나있다.

혼자 할 때는 잘 안되면 대충 포기하던 동작들도 더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끝까지 하게 되는데, 그 작은 차이가 수행 후 더 큰 만족으로 이어진다.

이른 아침에 시작하는 요가수업에 미리 등록해 두니 자동적으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된다. 요가스튜디오까지 걸어서 왔다 갔다 하는 산책길은 보너스다! 덕분에 아침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으며 단단하게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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