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레이스를 함께 달릴 파트너
어른답지 못한 내가 가뭄에 콩 나듯 가끔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대부분은 남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연인과 맹렬히 싸우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연인들과는 종종 한숨으로 가득 채운 소주잔을 이토록 건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의미 없이 부딪히며 무심한 말, 공허한 눈, 상냥하지 못한 태도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성격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주 싸울 순 없는 거라고. 그랬는데 남편을 만나고서 깨달았다. 파트너십, 즉 케미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고. 물론 남편과 아예 싸우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빈도도 그렇고 강도 측면에서도 남편과의 싸움은 지난 연애에서의 싸움들과는 달리 타격감이 현저히 적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편과 싸운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다. 싸움이라는 딱지를 붙일 만큼 강력한 것이었는지도 가끔은 의문이다.
내 생각에 남편은 내가 인생이라는 레이스를 달릴 때 꼭 필요한, 아주 훌륭한 페이스메이커의 자질을 갖췄다. 매일 감정의 고점과 저점을 새롭게 갱신하면서 감정이 널을 뛰는 나와 달리 남편의 감정선은 폭이 좁은 편이다. 감정을 밖으로 티 내지 않는 성격이라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게다가 나는 말을 꼭 내뱉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남편은 잘 들어주는 사람이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인생의 주요 이벤트들을 겪으며 나에게 닿았던 수많은 감정의 촉감을 남편에게 생생히 전하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남편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다는 걸 마음 깊이 느낀다. 느꼈던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고 남편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말로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힘이 있나 보다. 안전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남편이 내 이야기를 듣고 섣불리 나를 속단하거나 재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밌는 건 이토록 무던해 보이는 남편에게도 예민한 영역이 있다는 점이다. 내가 예민해하는 부분과 남편이 예민해하는 부분은 영역이 다르지만 분명한 교집합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 부부를 동시에 예민하게 만들어 감정을 흩뜨려 놓을지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을 똘똘 뭉치게 만드니 교집합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집합이 나와서 말인데 나와 남편은 낭만에 약하다는 공통점이 또 있다. 상상해 보라, 볕 좋은 날 바람 솔솔 부는 야외에서 첫 모금부터 머리가 띵해지는 화이트 와인 한잔 걸치는 것부터 어둑어둑 조용한 술집에서 어묵탕 한 그릇에 소주 5병을 클리어하는 것까지. 백해무익한 술을 우리들의 낭만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게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가 그리는 낭만에는 이렇게 사람 냄새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늘 낭만에 젖어 있지만은 않는다. 그러기엔 우리에게 닿는 현실이 잔인할 정도로 얄팍하고 꺼끌한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페이스메이커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스스로도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나를 좋은 페이스메이커로 봐줄까? 물론 이 또한 완성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개념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는 것, 그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너는 좋은 페이스메이커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직까진 당차게 긍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계속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높게 사달라고 말할 것 같긴 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남편 잘 만났고 나도 꽤 괜찮은 인간인 것 같다며 자랑만 줄줄이 늘어놓은 것 같아 꽤나 민망하고 염치없지만 핵심은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레이스를 함께 달릴 좋은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그 페이스메이커가 꼭 연인이나 배우자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일 수도 있고. 어떤 관계든 현재의 인생을 달릴 때 쉽게 지치지 않도록 옆에서 힘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면 된다. 나는 현생에 만난 이 페이스메이커 덕분에 내가 달리고 있는 속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 주변도 둘러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오늘의 레이스에서도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언젠가 받을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가슴에 새기고 먼 훗날 우리 둘 다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남몰래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