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응어리를 꺼내고 흘려보내는 용기
우리는 많은 것에 사로잡힌 채로 삶을 산다. 특히 나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성격이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반질반질 닦아 유리병에 고이 모셔두는 것처럼 좋았던 일들만 때 빼고 광내서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삶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겠나. 나는 상처받았던 일들을 켜켜이 쌓아두고 먼지가 쌓일 때 즈음이면 술자리에서 이따금씩 꺼내어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본다. 그저 훌훌 털어버리면 좋을 텐데 쉽게 흘려보내지 못하는 성격인 걸 어쩌겠나.
다정했던 아빠와 엄마 사이는 내가 대학생이 되고부터 자주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자식들도 다 컸으니 이제 노후를 어떻게 함께 재미나게 보낼지 고민했으면 참 좋았을 시기에 아빠는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고 그 사이에 엄마는 꽤 깊은 우울증을 얻어버렸다. 어느 날 새벽잠에서 깨 화장실을 가려 문을 열었는데 어둑어둑한 거실 끄트머리에서 베란다를 향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는 엄마를 보았다. 내가 봤던 엄마의 모습 중 가장 작았다. 멀리서도 엄마의 눈에 살고 싶은 욕구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반짝반짝했던 눈은 어디로 없어져 버린 걸까. 그렇게 웅크리고 있던 엄마는 며칠 후 스스로를 다시 찾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집을 잠시 떠났다. 엄마가 떠나고 우리 집은 균형을 잃고 자주 휘청였다. 엄마가 우리 집에서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밖에서 친구와 술 한잔 하다가 거나하게 취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동생과 함께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나하게 취한 건 아빠뿐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봐왔던 아빠의 친구분도 얼굴이 달아있었다. 아빠는 꼬질꼬질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몸도 못 가누고 의자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와 동생이 가까이 다가서자 아빠의 친구분이 벌건 얼굴로 나한테 한 말씀을 하셨다.
“소라야, 너 장녀잖니. 장녀로서 엄마 아빠를 제대로 챙겨야지. 이게 뭐니. 엄마 아빠 사이는 다 자식들이 맺어줘야 하는 거야.”
순간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했나, 바로 욱해서 발끈했었던가, 내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그때 내가 순간적으로 아빠를 바라봤다는 것이다. 나를 보호해 줘야지, 아빠! 하지만 고작 소주 몇 병이 집어삼킨 아빠는 실실 웃으며 친구의 말에 옳지! 하고 얄밉게 맞장구를 쳤던가, 흐느적거리느라 아무 말도 안 했던가. 엄마 아빠 사이가 이렇게 된 게 내 책임이라고 인정하는 거야? 아무튼 친구의 말에 끝내 반박하지 않은 아빠의 모습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크고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동생도 나를 꽤나 안쓰러워했다. 그나마 내 옆에 동생이 있었던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엄마 아빠의 사이가 나 때문에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건 모두가 아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그들의 사이를 평화롭게 중재해야 하는 것이 자식, 그것도 첫째인 내가 1순위로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뜸 연락이 와서는 엄마 아빠 좀 챙기라는 이야기를 듣느라 귀에 딱지가 않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머지않아 더 이상 그런 종류의 연락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 아빠가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아닌 한 인생의 주체로서 다시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을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하고 지지했다.
사실 나는 우리 가족의 평화, 즉 엄마 아빠의 돈독함을 위해 어렸을 때부터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해 왔다. 엄마 아빠가 싸우면 마치 판사가 된 것처럼 둘을 앞에 앉혀두고 엣헴, 하며 서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하게 시켰다. 재밌는 건 엄마 아빠가 나에게 장단을 제법 맞춰줬다는 점이다. 그러면 나는 역할에 심취해서 각자 서로의 잘못을 잘 알았으니 앞으로 뉘우치며 잘 살라고 조언했다. 초등학생 때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가족 간에 소통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가족신문을 만들어 모두에게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뭐든 써보게 시켰다. 전령처럼 엄마 아빠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동생이 사고 쳐서 집안 분위기가 박살 나면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가 가정평화에 왜 이렇게까지 광적으로 집착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마 동생 때문일 거다. 나는 애였는데도 동생을 자식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엄마 아빠가 갈라선다면 그 어린 게 높은 확률로 나랑 떨어져 살게 될 텐데 잘 살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걱정이나 하지. 아무튼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가정평화를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 내가 성인이 되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그들을 위한 삶을 오롯이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응원했던 건데 아빠는 예상대로랄까, 못마땅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엄마 아빠는 지금 각자 너무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에게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해 찌뿌둥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오랫동안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엄마한테 말을 꺼냈다.
“엄마, 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이 화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부단히 노력했었어. 내가 딸로서 그런 역할을 열심히 해낸 거에 대해 인정하고 고맙다고 해주면 나한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말을 들은 엄마는 눈물 커뮤니케이터의 엄마답게 눈물을 먼저 흘렸다. 그러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다음은 아빠 차례였다. 밖에서 아빠와 소주를 마시며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아빠에게도 똑같은 말을 건넸다. 술자리인데 맞장구쳐주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아빠가 허허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빠의 친구와 있었던 그 밤 생겨난 그 크고 깊은 상처는 이미 흉터가 된 때였지만 어쩐지 아빠의 반응을 보니 그 흉터가 살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마치 상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가리키듯이 말이다. 다행히 나는 채권 문제에 있어서 근성이 좋았다. 다음에 아빠를 만났을 때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지난번에 아빠가 고맙다고 말하지 않아서 꽤나 서운했어. 고맙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안 돼? 어려운 일이야?”
아빠가 말했다.
“그 말 하나 하는 게 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나 어렵데.“
끝난 줄 알았는데
“고마워.”
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제야 나는 엄마 아빠를 향해 묵히고 있던 응어리를 흘려보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십 년 만에 받는 인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응어리를 계속 이고 지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가족. 너무나도 가깝고도 먼 나의 행성들. 조심하다가도 방심하면 부딪쳐버리는 사이. 때로는 한 번의 충돌로 생겨난 파편들이 주위를 맴돌다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궤도 안에서 나아가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내심 안정감을 느끼고 언제든 서로에게 다가가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파편 하나쯤은, 기꺼이 품을 수 있을 정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