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면서 가장 미워하는 존재
아빠는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엄마와 결혼했다. 그리고 아빠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나는 네 살, 동생이 두 살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매치가 잘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빠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잇대라니.
내가 아빠에게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어렸을 때 정말 잘 놀아줬다는 점이다. 아빠는 틈만 나면 놀아줬다. 여름에는 갯벌에 가서 소금을 톡톡 뿌려 맛조개를 캤고 어떤 때엔 계곡에 가서 하루 종일 소금쟁이를 관찰하곤 했다. 매년 겨울에는 스키장에 갔다. 어렸을 때부터 잘 배워서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가면 곧잘 타게 된다. 주말에는 서울 근교에 있는 농장에 가서 우리 가족만의 텃밭을 가꿨다. 직접 기른 채소 위에 잘 구운 삼겹살을 올려 아기새 같이 입 벌리고 있는 나와 동생에게 하나씩 쌈을 떠먹여 주셨다. 매달 별의별 이름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쏘다니며 체험학습도 했다. 한지부채도 만들고 도자기도 빚고.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많이 경험시켜 준 아빠 덕분인지 나는 커서도 다양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회사에서 퇴근한 후에도, 충분히 쉴 수 있는 휴일에도 쉬지 않고 우리를 계속 놀아줬다니. 사실 집에 있을 땐 그냥 침대에 풀썩 몸을 맡기는 게 국룰 아닌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졌을 때에도 아빠가 놀아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는 게 더 놀랍다. 그렇게나 체력이 좋았던 건가, 아니면 정신력으로 버틴 건가, 가장이라서?
이십 대 후반에 내가 우리 집의 가장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가장이라고 생각하니 그 무게감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와서 내 마음을 어찌나 짓누르던지. 아빠는 아직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애가 둘이나 있었는데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감이 막중했을 것이다. 환갑이 넘은 지금의 아빠가 아직까지 삐딱선 타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나의 아빠는 내 유년시절 가장이라는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좋은 아빠가 되어주었다. 좋은 아빠의 품 안에서 나는 믿는 구석이 있는 양 마음껏 까불어대는 말괄량이로 자라났다.
하지만 아빠가 마냥 좋았던 건 아니었다. 아빠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밖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내가 중학생 때였나, 아빠가 술에 폭싹 적셔져서 집까지 기어들어온 적이 있었다. 사건 현장을 확인해 보니 아빠는 종이인형처럼 현관에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진지하게 아빠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아빠의 코에 손을 대고 체크했다. 생사를 확인한 후에 아빠의 바지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아서 몇 차까지 갔는지 영수증을 확인했다. 아빠는 고통스러운 듯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조금 있다 보니 아빠의 바지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이 아빠의 꿈틀거리는 움직임에 바닥으로 삐져나왔던 건지, 어느새 아빠의 얼굴은 동전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절레절레, 나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저렇게 술 마시지 말아야지. 지금 보면 어린 나의 굳은 다짐이 무색해지게 하는 진 씨 집안의 내력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나는 일방적으로 아빠를 미워했다. 엄마를 상처 준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빠를 너무나도 좋아했던 내가 갑자기 아빠를 외면하게 되어 나도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힘들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같은 여자인 내가 당신의 편을 들어주길 계속 바랐던 것 같다. 나는 의도치 않았지만 엄마의 그 바람에 충실히 임한 셈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아빠를 빼다 닮은 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아빠를 미워하는데 나에게서 자꾸 어렴풋이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바깥에서의 시간이 많아 얼굴 보기 힘들었던 시절의 아빠처럼 나도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빠 특유의 고집스러운 부분, 다소 현학적인 면, 고지식한 면모까지, 죄다 빼다 닮은 것이었다. 나는 문득 만약 지금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아빠의 얼굴만 둥둥 떠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아빠를 미워하는 걸 아빠도 알고 있었다. 나로서도 마음이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자꾸만 내 눈치를 보며 말도 없이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다가 나와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살고 아빠는 혼자 살기 시작했다. 아빠의 얼굴을 매일 보지 않게 되니 자연스럽게 그리움이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밉다지만 내 세상에서 최초의 어른은 아빠니까. 다행히 세월이 흘러 모든 게 의연해졌을 때 나는 아빠와 극적으로 다시 친구가 되기로 선언했다.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지만 또 동시에 가장 미워하는 존재를 온마음을 다해 용서하는 건 몇 년 동안의 관성을 거슬러야 하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몇 번이고 어색한 사이를 반복하다가 지금에서야 편한 사이가 되었다.
열두 살 때 아빠와 둘이서 동네 감자탕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말했다.
“아빠, 나중에 나 커서 어른되면 아빠랑 감자탕에 소주 먹으러 올래.“
“너무 좋은데? 꼭 그러자!”
아빠와 나는 새끼손가락 고리까지 걸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빠를 보고 싶을 때면 감자탕을 핑계로 댄다.
“감자탕 먹고 싶은데 아빠 올래?”
그러면 아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온다. 감자탕에 소주는 우리에게 일종의 시그널이 되었다.
서른세 살,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 나이에 아빠는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빠였고 가장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그때의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자식들에게 좋은 어른이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나이였던 아빠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왠지 나도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조만간 이 주제를 둘러업고 감자탕에 소주를 마시러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