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지 못하는 사람, 감춰야 하는 사람

적당히 약점을 드러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by 건빵진소라

생각해 보면 나와 남편은 말하는 양에 있어서 극과 극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정말이지 내가 봐도 질릴 정도로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입 밖으로 내뱉는 활자의 양 자체가 남들에 비해 훨씬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내 옆에 앉은 사람들은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고들 한다. 목청도 좋다는 뜻이 은근슬쩍 들어가 있다. 게다가 회사의 대표가 되더니 어째 전문성 있어 보이려 하는 건지 뭔지 몰라도 말투가 제법 또렷해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정리해 보면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더 가관인 건 낯가림이 거의 없다시피 살아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의 속살을 보여줄 만큼 큰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남편은 우리가 한 쌍의 부부라는 게 잘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다. 수다스러운 내가 재잘재잘 떠들어대면 남편은 혼자 이야기 속의 내가 그 당시 느꼈을 감정들을 단내가 날 때까지 곱씹으며 곧잘 힘겨워한다. 그런 그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이나 고민 따위에 대한 이야기 할리는 만무했다. 우리가 5년 차 부부임에도 나는 아직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모두의 예상대로 남편은 힘들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나 같은 예민스러운 아내에게 다행스럽다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운명 공동체인 나를 더 큰 불안으로 몰고 가지 않긴 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충분히 정서적으로 기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아 슬프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더군다나 남편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데에 시간이 다소 걸리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와 친해지기도 어렵고 친해진다 한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려운, 그런 속 시끄러운 사람.

언제 한번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남들에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약점 잡힐 수도 있잖아.”

평생 약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왔던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는 말이었다. 배를 까며 살랑살랑 재롱부리던 고양이가 잠시 멈칫하며 넥스트 스텝을 어떻게 취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나는 멈칫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오히려 약점이랄 것을 속 시원히 드러내야 상대방과 더 빠르게, 더 깊게 친밀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내 인간관계가 삐걱거리더라도 굴러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예상치 못한 이 말 한마디는 나에게 많은 것들을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끔 했다.

어쩌면 나와 남편은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점에 있어서 양극에 치달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개방적이고 남편은 너무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둘 중 어떤 것이 더 성숙함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나는 역시 중간 지점이라고 외칠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선뜻 약점을 내보이길 꺼려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전혀 안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약점이 될만한 이야기들을 수두룩하게 내놓을 때 사람들은 나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책맞았던 것 같다, 광대 역할에 심취해서는. 한편 남편은 술자리에서 아주 많이 취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누군가의 취약점이 될 수 있는 비밀을 누설하지도 않고 자신의 약점 또한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그런 그가 나에게 나름대로의 매력을 느껴서 결혼까지 골인했다는 사실이 지금 와서 새삼 신기할 따름이다.

남편이 이야기했던 약점을 잡힐 수 있다는 말이 내 귀에 맴돈다. 남편의 인생은 약점을 잡고 잡히는 역학관계로 둘러싸여 있었던 걸까? 모두의 예상대로 남편이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해답 또한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라 단언할 수 있다. 이것도 씁쓸한 일이겠지만 다른 한편에서 봐도 어쩐지 퍽 씁쓸하다. 우리가 사람이 사람을 약점 잡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 같아서 말이다.

<러브이즈블라인드 : 영국편>을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취약성”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가진 취약성을 누군가에게 드러냈을 때 꽤나 놀란 듯했다. 내가 이 정도로 취약함을 보였다니 그만큼 상대와 친밀해졌나 보다,라고 느끼는 듯했다. 어쩌면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도 적당함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너무 약하게 보이면 상대에게 상처받을 수 있고 너무 뻣뻣하게 보이면 상대를 상처 줄 수도 있다. 어쩌면 어른의 인간관계는 나와 너에게 상처 주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취약함을 보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전 15화자기 확신과 고집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