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대신 잠이 낫지 않나?

유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택한 차선책

by 건빵진소라

“벌써 자?”

남편이 나에게 자주 건네는 대사다.

“응. 피곤하네.”

“어떡해."

속상해하는 듯한 말투에 영문을 알 수 없어 되묻는다.

“왜?”

“걱정돼.”

또 한 번 되묻게 된다.

“왜?”

“그냥, 마냥 자는 건 아깝잖아.”

무엇이 아까운지 되물을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이미 답을 알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우리의 인생, 시간, 순간을 잠자는 것이 아닌 다른 것들로 꾹꾹 채워야 마땅하지 않냐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남편에게마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반골기질이 강한 나는 문득 '어차피 죽을 인생, 탱자탱자 잠만 자면 어때'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이렇게 더 살아서 뭐 해, 라는 생각도 조금은 삐죽 나온 채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날이면 날마다 나는 깊은 갈등에 빠진다. 할 게 없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는 나선형 갈등을 돌고 돌아 아직 저녁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든 말든, 현대인에게 적당한 수면시간이 8시간 내외든 말든 크게 괘념치 않기로 한다. 그러고는 하얗고 폭신폭신하고 아늑하기까지 해서 까칠하기로 유명한 우리 집 고양이들마저도 몇 시간 동안이나 뜨뜻하게 식빵을 구우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의 침대에 풀썩 고꾸라진다. 그때부터 나는 12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그저 잠만 자는 시간으로 곧잘 써버린다. 잠이 오지 않아도 거품에 감겨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눈을 감고 부지런히도 누워있는다. 그러면 시간이 술술 잘만 가는 것이었다! 물론 남편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함을 느끼기는 하나 '혼자 집에서 술을 옴팡 마셔대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면서 합리화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 시간 동안 줄곧 반복되면서 미안함이나 죄책감도 많이 희미해져 버렸다.

정신과에 드나든 지 5년 차, 여태까지의 정신과 선생님 중 네 번째 선생님을 맞이하게 되다 보니 의사 선생님의 곧은 말에 또 진이 다 빠져버릴까 봐 이제 병원에 갈 때만큼은 내 음주나 수면 행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어떤 선생님이든 걱정스러운 눈빛을 장착하곤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유를 되물은 적이 있었다. 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라 씨는 지금 인생을 일 아니면 잠으로만 쓰고 있는 거니까요. 휴식이나 오락도 우리의 인생에 꼭 필요한 요소랍니다."

"저는 술 말고 다른 방법으로 휴식이나 오락을 향유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종이를 한 장 들이미셨다.

"여기에서 흥미가 있는 걸 한번 시도해 보세요."

종이의 윗부분에는 '여가활동 추천 리스트 50가지'였나, 아무튼 비스무리한 문장이 제목으로 쓰여있었다. 종이를 받아 들고선 조금 얼떨떨했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 잘하는 모범생한테 어떻게 하면 재밌게 놀 수 있을지 물어본 것만 같아 후회가 조금 밀려왔던 건 우리들만의 비밀이다. 아무튼 그 종이에는 게임하기, 친구와 전화통화하며 수다 떨기, 뜨개질하기와 같이 흔히 말하는 생산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활동들이 제법 많았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을 갖다 버리는 행위로 보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누군가에 나도 해당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이를 다 읽었을 때마저도 고사상 옆에 고이 놓인 말린 명태 같은 눈깔을 하고 있었던 나는 집에 가서 다시 한번 그 종이를 한참 바라봤다. 흥미로워 보이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종이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그냥 나만의 방식으로 여가활동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그때부터였나. 유튜브 영상 편집부터 브런치에 글쓰기, 펜으로 세밀화 그리기, 일본어 공부하기, 필라테스 수업 듣기, 러닝 하기와 같은 취미를 시작하게 된 게.

나는 모 아니면 빽도 같은 사람이니 화려한 취미생활로 폭주하기 시작한 게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던 것 같다. 나의 폭주 루틴을 대충 아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오히려 가족들은 그간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고 나의 취미생활을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문제는 모 아니면 빽도 같은 나의 성격에 있었다. 한 번은 펜으로 세밀화를 그리는데 6시간인가, 7시간인가, 없던 예술혼을 끌어모았던 탓에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망부석이 되었다. 허리에서 '뽀각'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골칫거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완벽주의 성향이었다. 나는 몇 천 번, 아니 몇 만 번이 넘도록 스케치북 위에 펜으로 선을 그었는데 그 많은 선들 중 90% 정도는 마음에 차지 않았다. 선의 진한 정도, 선의 각도, 선의 길이, 선의 간격, 그리고 이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면의 질감까지. 1초 전에 그렸던 그 선 하나에 대한 미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선을 그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그래, 완벽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데에 의의를 두자, 라고 몇 번이나 애써 되새김질했는지 모르겠다. 그랬는데, 신기하게도 그림을 다 완성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제법 나쁘지 않은 그림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아까 내 심기를 거슬렀던 그 선이 어디에 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아무튼 와인을 한 잔 홀짝이면서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제법 즐겼던 것도 같다. (와인 한 잔 정도는 뭐, 예술혼에 불을 지펴주는 땔감이니까.)

그렇게 한 동안 빽도 없이 모만 던지며 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동안 내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흉내 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순간이 즐겁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영상을 위한 영상을 찍어야 할 것 같은 마음, 그림 다운 그림을 완성해야 할 것 같은 마음, 러너스러운 러닝을 인증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건 뭐, 보여주기식 여가 아닌가? 남들을 의식하는 내 모습에 괜스레 마음까지 붉어졌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잘 보낼 수 있는 걸까, 여전히 나를 곤란하게 하는 숙제다. 그치만 술을 퍼 마시는 것보다는 일찍 자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이 들면서도 하릴없이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잠이 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귀찮음을 떠안고서라도 제법 그럴싸한 한 끼 저녁 식사를 만들어먹고 공부하는 셈 치면서 새로 찾은 일본 드라마를 완주하고 1분이 10시간 같이 느껴지는 트레드밀 위에서 몸뚱아리를 내던지며 달리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주일에 일곱 번 과음 상태였던 내가 이제는 일주일에 삼분의 일은 과음, 또 다른 삼분의 일은 과수면, 그리고 남은 삼분의 일은 여가 시간으로 보내게 되었으니 이 변화를 아주 기특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빽도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일주일에 여섯 번은 상상만 해도 여백이 가득한 마음으로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