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좋아하는 사람의 이미지에 대하여
"어떤 이유로 미국 유학을 1년 만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건가요?"
지난 일본 여행에서 남편과 함께 타치노미(서서 마시는 술집) 형태의 와인바에 들렀다가 시카고에서 28년간 회계사 일을 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멋쟁이 아저씨가 유창한 영어로 내게 물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요."
돌이켜보면 나의 10대는 늘 허기졌다. 누군가에겐 마냥 든든하고도 따뜻하게 느껴질 '친구'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꽤 난도 높은 숙제로 다가와서 나를 자꾸만 초라하게 만들었다. 여기서의 친구가 쉬는 시간에 팔짱 끼고 화장실 정도 같이 가거나 간접뽀뽀를 감수하고서라도 립밤을 잠깐 빌려주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의 친구를 만드는 것조차 나에게는 꽤나 높은 허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새 학기가 되면 제법 친구처럼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곤 했다.
초등학생 때엔 이 계획이 늘 실패로 끝났다.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 온몸을 지배하던 시기였던지라 친구들은 융통성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나의 모습에 이골이 난 듯했다. 한 번은 선생님께서 수업 도중에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떠든 친구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어두라고 하셨는데 그때 나는 말 그대로 입을 한 번이라도 놀린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적었다. 친구들의 야유에도 굴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 대신 2년 연속 전교부회장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마냥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본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몇몇 친구를 사귀었고 나름 하하 호호 웃는 시간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오지는 못했다.
그간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주목받고 싶은 욕구가 컸던 나는 안타깝게도 입만 열면 주변을 썰렁하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 당시에 공부 외에는 딱히 인풋이 없었으니 내가 내뱉는 말들은 교과서에 실려있던 개념적인 단어들의 경악스러운 조합 정도였을 테다. 나의 썰렁한 농담을 들을 때면 친구들은 애써 웃으면서 '난 너랑 달라. 나, 되게 재밌는 사람이야'라며 선을 긋기 위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듯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한 번은 남동생이 누나는 진짜 썰렁한 사람이야,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며칠 동안 눈이 퀭해져서는 어떻게 하면 재밌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뇌했던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성인이 되고서 술 마시는 광대가 되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를 지나고서부터 나는 소위 말해 "인싸"라 불리는 그룹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술자리에 빠지지 않다 보니 그런 이미지가 심어진 듯하다. 실체는 그렇지 않지만 나름대로 그런 수식어를 즐겼던 것도 같다. 누군가를 통해 "걔, 소라 너랑 친해지고 싶다더라"라는 말을 건너 듣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10대 때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소라님은 술 좋아하세요?"
"네, 거의 (중독) 센터 가야 할 정도예요. 가서도 해결이 안 되면 손목을..."
여기에 손목 위를 톱으로 슥삭 하는 듯한 제스처까지 곁들이면 딱딱한 자리로 만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경계 없이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한편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는 어떤 회사든 꼭 한 명씩 있는 술 좋아하는 아빠뻘의 본부장님들이 먼저 나서서 나를 챙겨주시기도 했다.
"소라 씨는 저기 있는 술 짝으로 가져다가 마셔야 하는데!"
대놓고 술 좋아한다고 당차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신이 나실 법도 하다.
아직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호감으로 비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눈을 반짝이면서 후속 질문들을 퍼붓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 것을 보니 그렇게 나는 믿게 되었다. 물론 어찌 좋은 이미지만 있겠냐만은 술을 좋아한다고 하면 특유의 이미지가 떠오르긴 한다. 고독이나 미식 둘 중 하나를 음미할 줄 아는 사람, 인생의 쓴 맛을 느낄 줄 아는 사람, 헐렁한 구석이 있어서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풍류와 낭만을 좀 아는 위트 있는 사람. 어쩌면 지난 나의 인생에서 사람들에게 뜨겁게 주목받고 싶었던 만큼 이런 이미지에 강렬하게 현혹되어 술에 물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허기를 안고 산다. 그 허기가 때로는 급성으로 찾아오기도 하는데 문제는 내가 아직 관계의 깊이를 감당할 여유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꾸만 지치고 또 술을 찾게 되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술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 또다시 친해지고 싶은 위트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맨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술의 딜레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