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처럼 뚱뚱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스스로 인식하는 나의 외형, 그리고 그로 인한 자기부정

by 건빵진소라

열아홉 살이었다. 공부 외에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는데 그걸 핑계 삼고 싶진 않지만 아무튼 몸무게라는 지표는 인생 최고점을 기록하고 있었고 무인도에서 한 10년 살다 나온 사람처럼 문명이 빚어내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덥수룩한 머리에 포동포동하면서도 까무잡잡한 피부. 거기에 검은 뿔테. 그 모습으로 아흔이 훌쩍 넘은 친할아버지 댁에 갔다가 듣기 싫은 소리를 장대비처럼 맞고 마음이 홀딱 젖어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우리 집안에 너처럼 뚱뚱한 사람은 없었다."

그 순간 두 눈이 벌게지는 걸 느꼈던 나는 잠시 화장실 좀, 하고 화장실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두 손으로 틀어막고 몰래 울었다. 가족이 꽂는 비수가 훨씬 아프고 훨씬 오래 잔상을 남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이때였을지 모르겠다.

스무 살이 되었다. 세상이 좋아지긴 한 건지 가만히 누워서 침을 맞고 평소에 꼬박꼬박 한약을 잘 챙겨 먹기만 해도 살이 순식간에 쭉쭉 빠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질러버렸다. 그렇게 겨울방학 중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15kg을 감량하게 되었다. 물론 하루에 밥 한 숟가락만 먹는 극단적이고 강박적인 다이어트로 인해 몸과 마음이 15년은 훌쩍 늙은 것 같았다. 게다가 매일 거울을 보다 보니 내가 그렇게 살이 많이 빠진 건지, 예뻐지긴 한 건지 좀처럼 파악이 되질 않았다. 아직 친할아버지의 타박이 들리는 듯했다. 그래, 여전히 우리 집안에 나처럼 뚱뚱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내가 달라지긴 달라졌는지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침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긴 했다. 교복 치마를 입으려고 꺼내봤더니 치마가 너무 커서 단추를 끝까지 잠겄는데도 허리가 널널했던 것이다. 누가 작정하고 치마를 내리면 내려갈 정도로 헐렁거렸다. 깜짝 놀랐다. 15kg이라는 숫자가 확 와닿았다. 나는 일단 크게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학교에 갔다. 그렇게 교실에 들어섰는데. 여고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나이 여자아이들의 데시벨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순간 반 친구들의 괴이하고도 발랄한 함성에 나는 깜짝 놀라 자빠질 뻔했다. 나를 아는 친구들도, 내 얼굴만 아는 친구들도, 학교 선생님들도 갑자기 어린이 한 명 정도를 몸에서 꺼낸 듯한 내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졸업식이 진행되는 강당에서 내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 정도로 드라마틱한 줄 몰랐는데. 아무튼 본전을 뽑긴 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고서 살이 다시 5kg 정도 쪘지만 그럼에도 예전처럼 뚱뚱하다는 소리를 듣진 않았다. 하지만 영국으로 인턴십을 간 동안 내 몸무게는 다시 10kg 정도 쪘고 (그 상태에서 산티라는 친구에게 진심 어린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그의 진심이 다시 한번 묵직하게 느껴진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침과 한약으로 몸무게를 다스렸다. 그렇게 내 인생은 고무줄 몸무게와 함께 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즈음 고3 졸업식 때의 몸무게로 돌아왔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야근이 빡센 회사에 갓 입사했던 시기기도 했고 그때 만난 지독한 팀장 덕분에 마음고생을 원 없이 해서 살이 쪽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여전히 뚱뚱하다고 생각했다. 늘 스스로를 뚱뚱하다고 하는 내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남편도 내가 마른 체형은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드레스를 입는 날 만화에 등장하는 클리셰 장면처럼 드레스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주는 단추들이 나의 푸짐한 살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와 우리들의 이마에 박히면 재밌겠다는 상상을 하며 낄낄댔다. 하지만 드레스가 내 몸에 비해 너무 작을까 봐 걱정했던 우리들의 우려와 달리 놀랍게도 드레스는 나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잘 맞았다. 나도 나지만 평소에 몸에 달라붙는 옷을 좀처럼 입지 않는 내가 체형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왔더니 남편도 깜짝 놀라버렸다. 물론 어떤 의미로 놀랐는지 꼬치꼬치 묻지는 않았지만 상상보다는 날씬했던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따름이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몸이 뭔가 이상했다. 잘 맞던 옷들이 하나 둘 맞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결혼식 때의 몸무게에 비해 14kg이 쪄버렸다는 것을. 고3 때 다이어트 하기 전의 몸무게와 같은 숫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타박이 또 들려왔다. 우리 집안에 이렇게 뚱뚱한 사람은 없다, 고. 지금은 다시 조금씩 조절하면서 어찌어찌 4kg 정도를 감량한 상태인데 아직 10kg이나 더 빼야 한다는 사실에 암담할 뿐이다. 살은 빠졌으면 좋겠는데 맛있는 술도, 야식도 와구와구 먹고 싶고 땀나는 운동은 기어코 하기 싫고. 그렇게 입으로만 다이어트를 외치는 소위 '아가리어터'로 수개월 버티고 버티다가 남편에게마저 한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아."

저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였을까. 이렇게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남편에게 들켜버린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마음이 이상하다는 핑계를 대고 우울증 뒤에 숨어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하기 싫은 운동을 좀처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고 즐거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나는 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까. 나는 왜 스스로와 한 약속도 지키지 않는 걸까. 나는 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자기 관리 잘하는 멋진 대표로, 남편에게는 여전히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지금의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폭염이 찾아와도 행여나 체형이 드러날까 반바지나 민소매 한번 입지 않는 내가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비키니를 입고 여름휴가 사진을 거리낌 없이 올리는 친구들을 보며 날씬한 그들의 삶은 얼마나 안온할까 상상하는 게 스스로 보기에도 참 못났다, 싶다. 한술 더 떠서 이미 토라져버린 듯 다 포기하고 술이나 퍼 마시는 내가 유치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 싶다. 그럼에도 뭐 어쩌겠나. 다시 찾아올 여름에 비키니까지는 못하더라도 7부 바지 정도는 입을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해야지. 일단 오늘 딱 한잔만 더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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