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려운 세상에서 나와 너를 살리는 지극히 간단하지만 근사한 방법
"내가 너희 어머니였어도 딸 자랑하고 다닐 것 같아. 스스로 잘하고 밝고 다정한 딸.”
10년 전에도 여지없이 자주 쭈글거리던 내가 스스로 초라한 사람 같다고 푸념할 때면 어김없이 때마다 나타나 나에게 기운을 북돋아주던 친구가 해준 말이었다. 글쎄,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봤을 때 친구의 사려 깊은 의도와 달리 저 말은 맞는 구석이 없다. 일단 우리 엄마가 나를 썩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거니와 남들에게 자랑하고 다니는 것 같지도 않다. 더군다나 스스로 잘하고 밝았던 때가 내 서른셋 인생에 존재하긴 했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나마 굳이 굳이 꼽자면 다정하다는 말이 여전히 유효할지 모르겠다. 다정한 말을 건넨 그 친구 덕분에 내가 다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야트막하게라도 품게 된 것이겠지.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생각한 이미지와 실제의 내가 너무 달라서 놀랐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첫인상에 대한 감상을 묻는다면 백이면 백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일 것 같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얼음소녀 같은 이미지가 와르르 깨진다고 다들 말을 보탠다. 방정맞은 말투와 주책맞은 어휘력 덕분인지 누구를 만나도 첫 만남 때 상대를 웃기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광대처럼 변하는 나를 신기하게 보는 이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나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내가 제법 다정하려고 노력한다는 걸 슬슬 눈치채는 듯하다.
최근에 내 머리는 거지존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 기장이 하필 개그맨 임우일 님이랑 비슷해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자꾸만 그분이 생각난다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나름 대표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품위유지 차원에서 미용실에 달려갔다. 원장님은 나보다 다섯 살 정도 많은 언니였는데 언제 마주치든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예쁘게 웃고 계셨다. 그날도 그랬다. 원장님은 예쁘게 웃으시며 내가 사전에 보내둔 레퍼런스 사진들을 보았는데 지금의 기장에선 이런 스타일이 좀 더 자연스럽고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내 앞에서 사진들을 넘기며 보여주셨다. 나는 마치 일터에서 인쇄 촬영 때 쓸 레퍼런스를 고르듯이 원장님과 신중하게 스타일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곤 본격적으로 파마를 시작했는데 다른 미용실에서도 봤던 것 같은데 로고 아래에 적힌 "Hair design house"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올올이 원장님의 재빠르고도 야무진 손에 맡기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 머리카락은 흠뻑 젖기도 하고 찹찹 소리를 내며 펴지기도 하고 동그란 롤에 말려서 뜨겁게 데워지기도 하면서 1년 치 밀린 제 할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시간 동안 원장님은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직원들에게 카리스마 있게 디렉션을 주기도 하고 세심하게 피드백을 주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관찰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수다랄 것을 거의 떨지 않았고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머리에만 집중했다.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거울을 봤을 때 원장님이 보여주신 레퍼런스 사진과 거의 똑같을 정도로 예쁜 머리가 완성되어 있었으니 그 단어들이 떠오른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많은 미용실들이 디자인이라는 단어로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오늘 내가 본 스태프분들처럼 디자인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곳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같다고. 어쩌면 다들 디자인 스튜디오라는 말을 쓰니까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응당 그렇게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뭐, 이렇게까지 생각할 일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고 한낱 머리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날 모두 사명감을 갖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함께 으쌰으쌰 하는 모습이 꽤나 숭고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못해도 스무 번은 넘게 미용실에 갔을 텐데 이 날은 유독 누군가 자신의 일에 최선의 열정을 쏟아붓는 장면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생각이 들게 해 준 원장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충격과 감동이 공존할 수 있는 단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장님은 충격적일 만큼 감동받은 듯했다.
때론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부나 명예가 아니라 소소하지만 다정함이 깃들어있는 말 한마디가 맨 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운 세상에서 하루 더 살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에게 다정은 생존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