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
글, 그림: 고정순/ 길벗어린이
글 쓰는 일에 재미가 붙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말들이 평소보다 정리가 잘 될 때가 그렇다. 내 마음과 같은 댓글을 만나면 더 신이 난다. 그 마음을 쫒다 보니 글 쓰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썼던 글쓰기가 둘째 아이 낮잠 잘 때도, 아이들이 엄마를 찾지 않을 때도 틈틈이 짬을 내어 쓰게 되니 하루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글 쓰는 데 쓰는 셈이었다.
글 쓰는 것과 별개로 하루 24시간 중 내가 집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보통 전업 주부들이 하는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가 그렇다. 아이들 식사와 간식 챙기기, 청소, 빨래, 설거지 등등.
그런데 글쓰기의 재미가 커질수록 집안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로 크지 않은 구멍 같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식구들도 별 말을 하지 않아 이 정도의 구멍 정도는 괜찮다 여겼는지 모르겠다.
구멍은 점점 커졌다. 식구들의 말들이 조금씩 불편하게 들리면서부터 구멍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 식기세척기에 있는 컵 써도 돼요?”
컵을 씻을건지, 씻은 건지 물어보는 아이의 말이었다. 씻어 놓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씻을 계획도 없는데 날 재촉하는 것 같은 아이 말에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제습제가 옷장에서 넘어졌나 봐, 옷장에 물이 있어.”
제습제 확인할 때가 되었다는 남편의 말이었다. 그래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일들이라 조금 더 모르는 척을 했다. 컵은 바로 씻어주면 되었고, 넘어진 제습제는 즉시 치우고 새 제습제를 넣어두면 되니 조금 더 커진 구멍도 괜찮다며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서 저녁을 잘 먹고 들어 온 둘째 아이가 속이 좋지 않았는지 그날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입술이 하얘진 채 몇 번을 더 게워낸 아이가 졸음을 못 이겨 울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세탁기에 넣기 전에 아이 옷과 이불을 빨아야 했다. 화장실에 앉아 순식간에 잔뜩 쌓인 빨랫감을 주무르다 울음이 터졌다. 밖에서 먹은 저녁이 안 좋았나, 내가 뭘 잘못했길래 30개월 아이가 속이 아팠을까. 그 모든 일이 내 탓 같았다. 그 모든 일이 내가 글을 오래 쓴 탓 같았다.
그제야 몸집이 제법 커져 모르는 척할 수 없는 구멍이 보였다. 쌓여있는 설거지, 여름옷을 꺼낸다고 해 집어 놓은 옷장, 버려야 할 것들이 잔뜩 담긴 채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 그 어지럽고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며 너무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모은 것 뿐인데, 그게 이렇게 큰 구멍이 생길 일이었나. 오랜만에 찾은 재미인데 그만두어야 하나. 아이들이 어리니 결국 엄마의 역할만 해야 했던 걸까?’
그 마음을 며칠 더 끌었다.
슬슬 커진 구멍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당장 메우기로 했다. 워낙 성격이 급하고 손이 빠른지라 수습하는 일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옷장 정리도 후다닥, 설거지도, 아이들 식사도 당장 어딜 갈 것처럼 빠르게 해결했다. 오랜만에 하는 베란다 물청소로 구석에 뭉친 먼지들이 속절없이 흘러내려왔다. 그런데,
‘뭐야. 개운하잖아.’
하나씩 마무리되는 일에 의외의 개운함을 느꼈다. 흩어진 일상이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 개운함 덕분인지, 아이들이 엄마, 엄마 하며 부르는 목소리가 그날따라 부쩍 듣기 좋았다. 그래, 엄마다! 하며, 으쌰 하는 힘도 생겼다. 글을 쓰지 않고 보낸 며칠 동안 집안이, 가족들의 일상이 티가 나게 단단해졌다.
'이게 아이들 키우는 재미지.'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시소>는 시소를 타고 싶은 아이가 함께 탈 친구가 없어 혼자 타보려다 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소를 즐길 수 있게 된 이야기다. 혼자서 시소를 즐기기 위해 이쪽, 저쪽 왔다 갔다 애쓰는 아이를 보니 육아와 글쓰기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고민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시소를 제대로 즐길 수 없어 속상한 아이의 마음에서 커져버린 일상의 구멍도 보였다.
친구가 나타나서야 비로소 시소를 즐길 수 있게 된 아이.
'그렇지! 시소는 둘이 타야지.'
발을 차고 올라와 위를 보는 사이 반대쪽은 잠시 밑에서 기다려야하는, 혼자서는 재미가 없는, 둘이 있어야 비로소 오르락내리락 즐길 수 있는 시소 타기.
두 아이의 시소 타기를 보며 '엄마로서의 나'와 '글 쓰는 나' 모두 '나의 시소'를 즐기기 위해 함께 있어야 하는 모습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글쓰기를 쉬어야 하나 고민했던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문득 지난 연말, 아이와 나누었던 인생 곡선이 떠올랐다.
우리의 일상이 시소 타기가 아닌 것들이 있었던가. 역할에서도, 감정에서도, 인생 전반에서도. 우린 모두 시소를 타는 중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적당한 기다림이 필요한 시소타기.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상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상이 당연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발에 힘을 주고 엄마의 역할을 힘껏 높이 올린 날이었다.
오랜만에 아이들에게 시원한 보리차를 내어주었다. 끓이는 일이 귀찮아 미뤘던 일이었다. 시원하게 한 컵 비우며 더 달라는 아이들을 보니 덥고 습한 이 계절에 아이들에게 딱 좋은 일을 한 듯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기세척기에 컵은 씻어져 있고, 겨울옷은 정리되어 있고, 가방 속은 깔끔한 지금, 일상의 구멍이 작아지고 있었다.
작아진 구멍을 보니 글쓰기를 위해 발에 힘을 줄 시간도 기다려진다. 그 시간이 기다려져 아이들을 재촉하는 마음을 슬쩍 가져보기도 했다.
‘오늘은 일찍 자자.’
내 뻔한 속을 아이들에게 들킬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이 일어나지 않은 지금, 가족들의 일상에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지금. 글 쓰는 내가 높이 올라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