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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래토드 Mar 02. 2024

이 섬의 마지막 서점

생각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첫째 아이가 요즘 푹 빠져있는 책이 있다. 발행된 지 꽤 오래된 책인데, 도서관에서 이 시리즈만 몇십 권씩 낑낑대며 빌려와 읽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생일 즈음에는 선물을 직접 고르겠다며 서점에 가자고 했다. 시리즈 중에서 소장하고 싶었던 몇 권을 미리 골라 두었으니 그것을 생일 선물로 사달라는 것이었다.


웬만한 책이 다 있을만한 서점이라면 멀리까지 나가야 하는데, 우선 동네에 괜찮은 서점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섬에는 전에 서점들이 다소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문을 닫고, 시내에 딱 한 곳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는 주인장의 취향을 녹여낸 북카페나 북스테이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재고를 쌓아둘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고 24시간 운영할 수 있는 온라인 서점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는 알고 있지만, 또 내가 맡아서 운영하겠다고 나설 형편도 아니지만, 왠지 이 땅 위에 오프라인 종이책 시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섭섭했다.


그 와중에 딸아이는 온라인 책 구매는 싫다고 했다. 찾던 책이 없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더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에 가겠다고 했다. 직접 살펴보고 고르고선 그 자리에서 받아 나오고 싶다고… 이 녀석, 왠지 낭만을 아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섬에서 살아남은 그 마지막 서점에 찾아갔다.



공영주차장에서 내려 재래시장을 지나, 전에는 서점 골목으로 불렸다던 좁은  한켠에서 찾으려 했던 간판을 발견했다. 간판 아래 투명한 쇼윈도에는 한 문구가 낡고 흐려진 채로 붙어있었다.


가난한 자는 책을 통해 부요해지고

부자는 책을 통해 존귀해진다


그 순간에 나의 삶을 부요하고 존귀하게 만들어 주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내가 누린 풍요에 비하면,  마치 대가를 나눠내는 복권만큼 저렴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부요하게 되지만 모두 그렇지는 못하고, 존귀함을 얻어낼 책들이 많이 있지만 모두가 존귀하지는 못하다. 매번 부요하고 존귀하지 못했던 것은 책 탓이 아닌, 순간마다 배우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거리 위의 종이책 서점이 사라지고 있다. 시작은 실속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몇천 원 몇백 원 때문에 우리가 선택한 실속은 그다지 이득이 되지 않았다. 바빠서 서점까지 가 닿을 수 없다는 우리의 시간은 지금도 여전히 낭비되고 있다. 우리는 전에 하나를 고르러 가서는 그물망처럼 손에 쥐어지는 책들로 인해 다양한 어젠다를 깨닫고 새 길을 만들어 내었다. 당장 읽지 못해 한 구석에서 쌓여갔던 책들은 정해진 순간에 우리를 선택하여 읽혔고, 때문에 우리는 당시의 갈망했던 해답을 찾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책을 통해 풍성해졌다.


이 땅에서 종이로 만든 책이 사라지고 있다. 종이의 숨결을 사랑하는 세대가 최근까지 어느 정도 종이책의 증가를 이뤄냈지만, 이제부터 일어나는 다음 세대는 태블릿에 정서가 깃들여 있다. '사각'거리며 종이를 직접 들쳐보지 않고서도 글의 품질을 파악하는 법을 잘 알아낸다. 책의 디자인은 종이의 질감보다 화면의 픽셀에 감각을 녹여내는 것으로 좌우될 것이다.


이 세대를 향해, 글은 많이 읽어도 책은 읽지 않는 자들이라고 평한다. 사람이 생각해서 적어놓은 글의 축적을 가지고 기계가 학습하고 생각한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여 생각한 것을 사람이 값을 치러 산다. 내 것인 생각을 거저 주고 값이 오른 기계의 생각을 산다면 그것이 과연 실리일 수 있을까? 우리의 사고 체계는 앞으로 어떻게 바뀌게 될까?


어쩌면 종이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생각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점을 몇 바퀴 돌아도, 딸은 찾던 책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아이의 표정을 보며, 곧 찾아서 사주마 약속했다. 수많은 책들 사이를 함께 걸어 나와 출구 앞에 서는데, 갑자기 서점의 주인에게 그 책에 대해 묻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서점과 함께 30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현명한 부인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00이 있을까요?"


사실 아까부터 우리를 주시하고 계셨던 그 부인께서는 활짝 웃으시며, 딸이 찾던 책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셨다.


"우와, 있다 있어! 감사합니다!"


부인께서 가리키신 서가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하고 책을 찾던 딸은 급기야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아래 칸까지 샅샅이 훑었다. 동생들도 돕는다고 따라 앉는다. 한참이 지난 뒤에 드디어 책을 세 권 뽑아내었다. 발행된 지 오래되어 먼지가 하얗게 앉은 책들을 들고 이빨이 하얗게 드러나도록 기뻐하며 웃었다.


봉인해 놓는 것이 의미가 없다 하며, 몇시간 남겨놓고 선물 포장을 뜯어버린 아이는 열 두 번째 생일의 첫 타이밍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최고의 생일이에요!"라고 외쳤다.


책이 이 아이의 생일을 최고로 만들어 주어서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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