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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 Feb 12. 2022

나에게 피아노는 조성진이 전부였다.

덕업일치의 올바른 예

 가끔 일하다 잡생각이 들 때, 귀에 에어팟을 꽂는다. 무심코 켠 플레이리스트들은 대부분 조성진이 녹음한 연주곡들, 아니면 피아노 협주곡들이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들이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킨다. 그러면 잠시 잡생각을 덜어내고,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빠르게 일을 쳐내곤 한다. 가사라곤 하나 없는 피아노 연주를 무슨 재미로 들으세요?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사실 아직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멋들어진 말을 하기엔 오그라들고, 피아노 연주에 대해 아는 지식이 너무 적다. 그렇지만 일단 웃으면서 이렇게는 말하지 않을까? 조성진이 좋아서요.

난생처음 가본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MBTI에 'N'의 기질이 굉장히 도드라지는 내 성향상 어떤 것에 빠지게 되면 다양한 가정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 일본 드라마와 아이돌(쟈니스)에 무척 심취했던 적을 예를 들어보자면, 내가 일본에 가서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돌을 만났는데 일본어를 못해서 말해볼 기회를 잃는다면? 드라마 극장판이 개봉했는데 한국에서 개봉을 안 해서 한글자막이 안 나온다면 난 어떻게 보지?라는 말도 상황들이 내 머릿속에 떠다닌다. 그 망상을 없앨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일본어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 망상을 시작으로 나는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은 문맹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말은 할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가정법에서 파생한 내 의지들이 모여 결국 무언가를 하고야 만 것이다.

 피아노 역시도 그랬다. 사실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조성진의 팬을 자처한 '내'가 조성진을 좋아하는 데 피아노를 안치는 게 말이 돼?라는 생각 하나다. 조성진을 좋아하는 데, 피아노를 안치면 되겠나라는 생각하나로 당장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성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성진 때문은 아니었다. 잠 안 오는 평일 밤, 소파에 누워서 이리저리 유튜브를 보다가 별안간 추천 영상에 손열음의 놀면뭐하니 터키행진곡 연주 영상이 떴다. 그 영상을 보고 피아노를 쳤던 때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영상이 끝나자마자 조성진 쇼팽 콩쿠르 연주 영상이 재생되었다. 바로 쇼팽 콩쿠르 2번째 스테이지에서 쳤던 폴로네이즈 53번 영웅이었는데 그 영상을 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한민국에 이렇게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있다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손열음의 피아노 영상이 왜 조성진의 알고리즘으로 날 이끌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또한 운명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조성진 영상을 찾아보다 밤을 지새웠으니까. 결국 정리해서 말하자면 MBTI-'N'성향의 말도 안되는 논리로 조성진의 영폴(폴로네이즈 영웅)로 입덕하게 되어, 조성진의 팬으로서 품위를 갖추기 위해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조성진의 연주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하다. 분명 팬심도 덧붙여진 게 분명 하나 감정에 지극히 충실하면서도 기본기를 잃지 않고, 본인만의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이 내가 조성진의 연주를 사랑하는 이유다. 기본기가 몹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쳤던 연주곡들을 내 연습곡으로 삼는 이유도 내가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동을 조금이라도 내 손으로 치고, 느끼고, 구현하고 싶어서이다. 그 마음이 커질수록 연주에 대한 욕심도 커지고 있다. 좋은 징조이다. 조성진 덕분에 다시 치게 된 피아노가 점점 진심이 되고 있다. 이 진심이 부디 오래 지속되기를. 조성진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내 예술혼을 조금 더 진심으로 불태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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