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해설가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선 직업이다. 무슨 일을 하냐는 물음에 "숲해설가예요."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그게 뭐예요?" 하고 되묻는다. 남은 하나도 숲해설가에 대해 안다기보다는 '처음 들어보는 직업이지만 숲에서 뭔가를 해설하는 일인가 보다' 나름의 추론을 마치고 침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페셜가? 무슨 스페셜?" 워낙 낯선 단어라 이렇게 되묻던 사람들도 있었다.
스페셜가.
생각지도 못한 단어라 웃어넘겼었는데, 곱씹어볼수록 그 별칭이 자못 마음에 든다. 뭔가 스페셜한 일을 하는 전문가 같다.
전문가가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스페셜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다. 다른 직업보다 특별하고 특출 나다는 게 아니라 평범하고 사소해 보이지만 이 세상에 꼭 필요한, 마치 땅을 지지해 주는 기반암 같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은 작고 낯선 분야이지만, 앞으로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점차 커질 것이며, 분명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이라 믿는다. 그래서 자부심과 함께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 '이 일에 몸 담은 1인으로서, 시작 단계에 있는 이 직업을 올바르게 키워나가고 싶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 또한 갖고 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나는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관련학과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주변에 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이런 직업이 있다는 걸 안 지도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선생님', '강사님' 등으로 불리지만, 선생님을 장래희망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시절에 담임 선생님이나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좋아서 "나 커서 선생님 할래!"라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뭐, 어린이의 꿈은 자고 일어날 때마다 바뀌기 마련이니. 어쨌거나 과거의 수많은 경험과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분명 이 일을 업으로 택한 것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거나 뭔가 가르쳐 주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때는 친척동생들이 놀러 오면 선생님 놀이를 하곤 했다. 선생님은 물론 나고 동생들은 학생이었다. 교실에 있는 선생님과 학생의 역할 놀이였다기 보다는 공책에 숙제를 내주고 풀어오면 채점을 해주는 식이었다. 담임 선생님보다는 오히려 학습지 선생님에 가까웠달까. 빈칸의 글자 채우기, 맞는 것끼리 연결하기, 각자의 난이도에 맞는 간단한 사칙연산, 그림 그리기 등 손수 쓰고 그린 문제로 공책 두 바닥쯤을 가득 채우고 동생들에게 주면, 그 애들은 놀잇감이라도 받은 듯 재미있게 풀었다. 다 푼 공책을 가져오면 나는 선생님 흉내를 내며 채점하고 칭찬하고 틀리거나 끝내 풀지 못한 문제는 설명을 해주었다. 고학년이라지만 아직 초등학생 어린이가 낸 터라 엉성했을 문제들을 그래도 손수 만들고 설명해 주는 게 무척 즐거웠다.
중학생 때는 연상법으로 영어단어를 외우고 친구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낙하산(parachute)은 "낙하산을 펴라(para)! 슈웃!(chute; 낙하산이 펴지는 소리)"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친구들과 낄낄대며 외웠다. ―숲해설가 공부를 하면서 라틴어 학명을 외울 때에도 이 경험을 살렸다. 물론 학명 문제는 다 맞혔다.― 나중에 '경선식 영단어'라는 영어 단어 암기책이 나왔는데, 내가 하던 방식과 매우 닮아 놀랐다. 선생님이 책으로 낼 정도로 역시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구나 싶어 흐뭇하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는 근현대사 과목을 좋아해서 큰 종이에 연표를 그리고 사건들과 개요를 적어서 친구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연극을 하듯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입하여 신명 나게 재연하고, 주요 역사적 인물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나름의 살을 덧붙여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과장을 많이 보태자면 우리 반에서 만큼은 여고생 설민석이었달까. 아마도 친구들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옛날 이야기하듯 역사를 훑던 순간은 아주 즐겁게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지금은 숲해설가로 사람들 앞에 서서 자연과 동식물의 이야기를 전한다. 식물의 열매를 까보고, 먹어보고, 날려보고, 굴려보면서 그들의 신비로운 번식전략을 알려주고, 이름이 지어진 유래, 특유의 질감이나 향기를 소개하면서 신기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 자신에게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는 후기를 접할 때면 뿌듯하다. 곤충이 무서워 기겁하면서도 딸을 위해 용기를 내어 대벌레를 손에 올려보던 엄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신나게 칡덩굴 줄넘기를 넘던 아빠, 괭이밥 잎 먹는 걸 보여줬더니 피자보다 맛있다며 연신 따먹는 어린이까지. 기꺼이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열린 마음으로 자연에 스며드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 나간다.
나를 통해 사람들이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고, 앎으로 인해 관심과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이나 보람 있다. 숲에서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고, 좋은 기억으로 그들의 마음 한 페이지에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세상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나를 쓰는 것.
나의 오랜 바람을 이렇게 조금씩 이루어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뭉글뭉글, 고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