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시작 15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이 써야 한다

by 빛나라 오드리

우리가 매일 요구할 수 있는 것,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페이지 위의 결과물, 당신이 가진 이야기는 이 지구 상의 다른 누구도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들려줄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라.

_작가의 시작 p365



AM5:20 알람이 울리지 않았지만 눈이 저절로 떠진다. 이제 몸이 기억하는 시각이다. 언제부터인가 창밖으로 날씨를 확인하는 것보다 머리맡 휴대전화의 날씨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 당장의 날씨보다 앞으로 1시간 뒤의 날씨가 더욱 중요하다. 늑장을 부리다간 거리의 신호등에 밀려 도착시간이 늦어진다. 서둘러 어렴풋한 동물적 감각으로 옷을 찾아 입는다. 양치를 끝내고 두툼한 바지에 상의도 얇지만 따듯한 두 벌을 겹쳐 입는다. 넥워머와 모자까지 쓰고 나면 이제 문밖을 나서는 일만 남았다.


간 밤에 비가 내렸는지 거리가 축축하다. 고인물을 피해 차가워진 차에 몸을 싣는다. 이 시간에 벌써 나와 아파트를 걷는 분들이 하나둘 보인다. 아직 신호등이 다 켜지기 전이니 10분 내외면 산 입구에 도착한다. 날이 부쩍 추워진 뒤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반 이상 줄었다. 아직 동이 트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 이른 시간이다. 주차를 하려고 창문을 내리니 차가운 공기가 훅 스며든다. 도심지와는 사뭇 다른 공기의 온도에 정신이 바짝 든다. 아차 비상 우산이 없다. 언젠가 쓰고 챙겨두지 않았던 것. 여기까지 왔는데 되돌아가기는 그렇다.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입구를 향한다. 내가 걷는 길목은 가장 경사가 가파르다. 한 번에 올라야지 중간에 쉬면 배가 힘드니 단숨에 올라 숨을 고른다. 탁 트인 하늘은 구름 탓인지 별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보다 훨씬 깊은 어둠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바람이 한 차례 훑고 간 마지막 낙엽들이 길 위에서 춤을 춘다. 앙상한 가지만 남으면 참 외롭겠지만 그나마 겨울에도 푸른 나무들 덕분에 덜 외롭다. 달도 별도 없는 밤에 내 발자국 소리만 요란하다. 자전거용 도로와 도보용 도로로 나뉜 길 위에서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붉은 길 위로 걸음을 옮긴다. 아뿔싸 미끄럽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멀리 내다본다. 어느새 비밀의 문이 지나버렸다.


KakaoTalk_20211203_065537664_01.jpg 오늘 아침의 비밀의 문


문을 지난 순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일은 없다. 앨리스가 만난 토끼도 오랫동안 가꾸지 않은 장미도 없다. 하지만 먼지 하나 섞이지 않은 가볍고 찬 공기가 내 몸을 감싸고 좀 더 높은 하늘과 넓은 시야가 나를 길로 안내한다. 이제 다시 돌아가기에는 멀리 와버려서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오른쪽으로 시작되는 공원은 이름도 낯선 키도 잎도 큰 나무들이 줄지어 열을 갖추고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불빛이 운치를 더한다. 멀찍이 떨어진 정자는 떨어진 나뭇잎에 옷을 입고 이제는 좀처럼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한 듯 여유로워 보인다.


그렇게 길을 따라 20분 정도 걷다 보면 어느새 아주 넓은 길로 접어든다. 아까보다 1.5배는 넓어진 길 덕분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이제는 고개를 돌려야 좌우 다른 풍경을 고루 담을 수 있고 보다 역동적인 나무의 모습에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만 더 가면 작년 큰 비에 갑자기 쓰러진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눈앞에서 상상도 못 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길 가에 누워버린 나무에서는 비를 피해 숨어든 이름 모를 곤충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이제는 밑동만 남아 작은 동물들의 작은 쉼터가 되었다. 무참히 쓰러진 나무가 안타까웠지만 그 안에 보금자리를 튼 생쥐 가족을 만난 뒤로는 조금 위로가 되기도 했다.


아카시아 향기에 취했던 길을 지나 밤나무 숲에 다다랐다. 밤이 살이 올라 꽉 찰 때면 이른 새벽에도 밤을 줍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유독 달디 단 밤은 이 시간에 나오면 내게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오늘은 토끼와 수탉들이 나왔으려나? 날이 추워지니 이 녀석들도 늦잠을 자는지 요즘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밤나무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은 어림잡아도 스무 마리 정도 되나 보다. 동물들이 놀이터 삼아 노는 곳은 멀리 도시가 보이는 널찍한 전망대다. 그곳에서 이제 막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불빛들을 바라보고 다시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간다.


돌아가는 풍경은 또 다르다. 왔던 길이라 지루하지 않다. 갔던 길이 내리막길이라면 이제 오르막길이다. 숨이 점점 차오르지만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굵어진다. 마음이 급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빗소리는 가을 빗소리와 다르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가지에 빗물이 닿으며 좀 더 둔탁한 소리로 변해간다.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 오늘은 해가 정말 늦게 나오려나보다.


빗물에 젖은 건지 땀에 젖은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기분만은 상쾌하다. 이렇게 시작한 하루는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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