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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Jan 18. 2022

붉은 악마를 입은 동양인 2

낯선여행지에서 만난 인연

한 달 넘게 홀로 여행하다 보니 사람이 그리웠다. 한국인. 한국말. 유럽까지 가서 한국인들 북적북적한 관광지는 싫다고 한적한 곳만 찾아다니다 보니 외로웠다. 한국말이 하고 싶었다.     

“한국인이죠?”


붉은 악마를 입은 동양인이었다. 중국인, 일본인 다 구분할 수 있는데 분명 한국인인데? 그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급하니 오늘은 나간다. 영국도 아닌데 어제부터 계속 흐리다 개다를 반복한다. 오늘은 버스를 타고 외곽에 있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보러 간다. 버스 안, 까만 눈동자에 동글동글한 동양인은 나뿐이다. 나이 많은 노란 머리 할아버지가 빙긋 미소를 보낸다. 안녕? 

유럽에서 수많은 성을 다녔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유일한 성이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요새에 갇힌 성. 수많은 비밀을 지닌 듯 들어가는 길조차도 쉽지 않았다. 자그마한 호수를 끼고 좁은 통로를 지나 미로처럼 이어진 방을 차례차례 드나들었다. 갑옷을 입은 기사도 누군가의 초상화도 낯설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어둠이 내리면 어디선가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무도회가 열릴 것만 같았다. 습한 공기에 간혹 코끝을 스치는 눅눅한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궂은 날씨 탓에 일정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며칠 계속 걸었더니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기분이 별로였다. 이럴 땐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따끈하게 쌍화탕 한 잔 마시면 좋은데…. 아쉬운 대로 뜨거운 핫초코에 기운을 빌려본다.      


젊은 여행객들은 아직 이른 시간이다. 

숙소는 텅 비었을 것이라는 내 예상을 뒤엎고 방에는 아침에 만난 그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똑같은 질문을 또 했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는 미국인이었다. 부모님이 홍콩사람인데 깔끔한 외모의 동양인이었다. 내 기준에 동양인 중에 가장 괜찮은 인물은 한국인이다. 여행 다니며 만나본 많은 동양인은 동양인들만 구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 눈에도 서양인은 다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어쨌든 그는 아니다. 배낭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보름을 머물다가 왔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친구는 기념으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선물했고 나는 그가 한국인이라 믿었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우린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가까운 파스타 집에 가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잊지 못할 파스타를 먹었다. 유럽 여행하는 동안 가장 비싸고 맛있는 한 끼였다. 그렇게 이른 저녁을 먹고 걸어 숙소로 돌아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영어를 이렇게 잘했나 하는 의문이 들 만큼 깊은 이야기를 했다. 공부에 대한 부담감,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상처, 앞으로의 진로…. 첫 만남에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놨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놀랍다.

      

그날 밤, 숙소 카페테리아에서 아껴둔 소주 두 팩을 해치웠다. 거기 모인 수많은 젊은이와 함께 딱 한 잔씩. 나는 소주를 잔에 따라 나눠주고 소주에 대한 설명은 그가 했다. 술과 함께 시작된 게임은 369, 그리고 배스킨라빈스 31.      


뒤늦게 알았다. 그가 그날 보관함 앞에 침낭 하나에 의지해 웅크리고 잠을 잔 건 나 때문이었다. 헝가리에서 하루 일찍 넘어오는 바람에 그가 머물 침대를 내가 차지한 것. 예약을 제대로 했는데 왜 남는 침대가 없었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해하던 그 표정이 어렴풋하다.      


스페인으로 떠나고 싶다던 그는 가지고 있던 기차표를 취소하고 비행기를 예약했다. 나는 다시 누군가를 만나러 낯선 곳으로 향했다. 새벽같이 떠나는 나를 배웅해주겠다며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있었다. 뜨거운 핫초코를 나눠 마시고 아쉬움이 가득한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기차에 올랐다.      


프랑크푸르트를 향해가는 기차 안에서 알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힘들지만 지금의 방황을 끝내고 꼭 멋진 의사가 되었기를 아니 그가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혼자 떠난 여행이 좋은 건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 떠난 여행이 힘든 건 외롭다는 것이다. 난 그 이후에도 많은 여행을 혼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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