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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Jan 18. 2022

붉은 악마를 입은 동양인 1

뮌헨에서 만난 인연


"한국인이죠?"

목소리는 잔뜩 상기되었다. 어딜 가나 숙소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건 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잠이 드는 것도 역시 나다. 

혼자 하는 여행의 단점은 밤문화를 즐기기 쉽지 않다는 것.

오늘도 일찍 일어났다.

락커에서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가려는데 한국인은 다 아는 붉은 악마를 입고

웬 사내가 잠들어있다. 잠시 망설일 틈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한국인이죠?"



숙소를 잃고 길도 잃은 헝가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2박을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24시간 후 다시 역에서 뮌헨행 기차에 올랐다. 간 밤에 만난 브라질에서 온 여학생은 헝가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우울함에 빠져있는 내게 좋은 곳을 소개해주고 원한다면 내일 함께 여행해도 좋다며 선심 썼다. 그리고는 온 몸을 스프레이로 샤워 한 후 침대에 누웠다. (내가 만난 외국여행객은 잘 씻지 않더라.) 핑크빛은 아니어도 이제 다홍빛 즈음은 되겠다. 


억울함이 가시지 않은 채 새벽을 맞았다. 다시 배낭을 싸서 세체니 다리까지 걸었다. 운무에 쌓인 강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웠다. 곳곳에 서있는 청동상도 제법 운치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길 떠나야지... 기차역에는 저마다 어딘가로 떠날 노동자들과 여행객들의 분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둘러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시 담배연기로 채워지기 전에 잠을 청했다. 마음은 지쳤고 다리는 무거웠다. 


9시 반쯤 탄 기차는 5시가 다 되어서야 뮌헨에 도착했다. 

어제부터 빈 속은 요란하게 신호를 보냈다. 조금만 참아라. 일단 숙소부터 찾아보자. 중앙역 근처에 저렴한 유스호스텔을 찾아갔다. 다행히 뮌헨에 좋은 숙소를 예약해뒀는데 이번에는 아닐 거야. 주문을 외웠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둑해진 거리에 불빛이 켜지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5분 거리, 숙소는 있었다. 많은 여행객들이 별을 남긴 성지. 깔끔한 숙소에 짐을 풀고 먼저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 했다. 내가 머물 숙소는 남녀 혼숙이라 가능한 이른 시간에 씻어야 했다. 


어두운 거리를 잠시 걸었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가 낯설지만 짐을 덜어내고 나니 한결 가벼웠다. 가까운 식당에서 따뜻한 한 끼로 나를 위로했다. 그래 이런 일도 있지. 내일이면 괜찮을 거야.



왜 대낮에 안 놀고 밤에 노는 건지. 어젯밤에도 시끄러웠다. 전 세계에서 모인 이들은 오늘이 마지막 밤인듯 놀았을 것이다.  알코올 냄새가 코 끝에 향긋하게 닿았다. 가방 저 밑에 숨겨둔 소주 두 팩이 문득 생각난다. 나의 비밀 병기.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오늘은 가야 할 곳이 많다. 가까운 지방에 다녀와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침대에서 내려오니 왠 건장한 청년이 잔뜩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침낭 하나에 바닥에서. 하필 내 락커 앞에! 조심스럽게 그를 피해 살며시 락커 문을 열었다. 그는 몸을 살짝 틀어 옆으로 비켜주었다. 난 봤다. 그가 입고 있는 붉은 악마! 

한국인은 다 아는 그 옷.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그 옷.


"한국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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