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을 잃은 아이들
대면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제 수업의 핵심은 체력이다. 대면으로 만나는 친구들은 그만큼 또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몸으로 게임하기, 노래 부르기, 관심 유지하기 등등. 비대면으로 만날 때는 영상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가령 수업 주제와 관련된 영상을 보여주고 그 영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오늘 읽을 책으로 넘어간다. 책이나 작가와 관련된 영상을 보여주는 것도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데 충분하다. 대면 수업이 비대면보다 훨씬 많은 장점이 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이들은 비대면 수업일 때 훨씬 집중을 잘한다.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번 주제는 환경이라서 폐품을 활용한 다양한 만들기도 수업에 중요한 시간을 차지한다. 분리수거함에서 폐품을 잔뜩 주워 재료 준비도 끝냈고 한 권 한 권 책도 골랐다. 인원이 많지 않으니 함께 하면 충분히 시간 안에 만들기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엉거주춤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얼굴에 긴장한 빛이 도는 건 낯설기도 하지만 이 수업이 영어 수업이기 때문이다. 초등 1~2학년 수업인데도 영어라는 두 글자에 부담을 갖는다. 설렘이 아니라.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콘텐츠로 분위기를 이끌어놓고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 얼굴이 제법 진지하다. 책을 덮고 한 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친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선생님 이제 집에 가도 돼요?
어? 집에 간다고?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속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답할까 망설이는데 아이가 다시 크게 이야기한다.
선생님 수업 재미없어요. 저 집에 갈래요.
아차! 기회를 놓쳤다. 분위기가 술렁술렁해졌다.
아이들은 무척 단순하다. 나는 재미있었는데 옆 친구가 재미없다고 하면 어 그런가? 하고 내 마음을 재 확인한다. 강사로서는 무척 난감한 순간이다.
사실 자신이 수업을 선택해서 오는 친구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아이들에게 이 수업이 어떤 수업인지, 내가 듣고 싶어서 신청했는지 먼저 물어보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친구 중에는 어떤 수업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오는 친구들이 과반수이다. 물론 나도 엄마이기에 부모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무료 수업이고 내용이 아주 나쁘지 않다면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엄마와 같지 않다.
이런 경우 나는 막대한 책임을 갖게 된다.
첫째, 관심이 없는 친구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것!
둘째, 재미와 호기심으로 장착하여 다음 수업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할 것!
셋째, 더불어 영어에 흥미까지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목표 달성!
영어와는 거리가 먼 마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최대한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끝까지 이번 수업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이기에 큰 무리 없이 지금까지 잘 해왔다. 아이들은 내 수업을 흥미 있어했고 내 수업만 따라다니는 일부 팬층도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미 영어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쳐서 잔뜩 화가 난 채 앉아있는 친구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게다가 제 시간도 아닌 늦은 시간에 간신히 도착해서 겨우 책 읽는 것만 다 들었다.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친구들에게 만들기 재료를 나눠주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주문하고 친구를 앞으로 불렀다.
"지금 많이 피곤하구나? 어디 다녀왔어?"
"네 저 지금 영어 학원 갔다가 바로 온 거예요. 단어 시험 보느라 힘들었는데 여기서 또 영어 하려니까 짜증 나요. 집에 갈래요."
"그런데 어쩌지? 선생님은 친구를 집에 보낼 수가 없어. 아직 시간이 끝나지 않아서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고 선생님이 ㅇㅇ가 이 수업 듣도록 신청하지 않았거든. 오늘은 끝까지 기다리고 집에 가서 부모님하고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그럼 제가 이 수업 듣는다고 하지 않았는데 누가 신청했어요? "
"글쎄 부모님이 신청하셨을 거 같은데?"
아이와 긴 대화가 이어졌다. 아이는 억울해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이 상황을 난감해했다. 나 또한 답답했다. 다른 아이들은 신나게 만들기를 하며 다양한 질문을 이어가는데 그 친구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낀 채 풀이 죽어있었다.
무엇보다 답답한 건 집에 가서 이야기했을 때 과연 친구의 말이 통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부모님이 친구의 말을 들어준다면 다행이지만 안 들어준다면? 그럼 나는 적대감이 가득 찬 이 아이와 남은 횟수를 채워야 한다. 아이의 마음도 달래주고 수업도 재미있게 하고 적어도 수업이 끝날 때 즈음 영어로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도록 해서 보내야 한다.
아이의 마음에 이미 세워진 빨간 벽이 느껴졌다.
아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아이 마음 안에는 두꺼운 장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내 마음은 이미 떠나 있을 것이고 시간이 많이 흐르리라는 것이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무료하게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옆에서 계속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형이 야속했다. 사실 손을 든 아이는 동생이었고 바람을 넣은 건 형이었다. 동생은 만들기에 흥미를 느껴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형은 "야 그거 하면 다음 시간에 또 와야 해!" 하며 동생의 마음을 가로챘다. 살짝 열린 틈조차도 없애버린 것이다.
수업이 끝났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고 오늘 함께 읽은 책에 관한 질문을 한 사람씩 나눈 후 하이파이브를 했다. 돌아가는 아이들 표정이 무척 밝았다. 그 형제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