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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솔 Nov 03. 2023

마음에 불꽃이 사라져서 퇴사합니다

97년생 MZ esfj 신입 비혼주의자 베지테리언의 일기 1

"네가 지금 일이 많이 힘든 상황도 아니고 동료들이랑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잘 적응하고 있다가 왜 지금 퇴사를 하겠다는 거니?"


퇴사 결재를 위한 사장님과의 면담 자리에서 나는 제목처럼 나의 진짜 퇴사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대신에 본가로 내려가 부모님 가업을 도와야 한다는 핑계와 직무가 잘 맞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유를 얼버무렸다.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성실하게 주도적으로 일하는 신입사원이 한참 성장해야 할 시기에 퇴사를 하겠다 하니 50대 후반, 기성세대 사장님은 전혀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사장님은 요즘 MZ의 생각이 정말 궁금하다고 했다.


나도 회사에 퇴사를 말하기 직전까지,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을 겨우 넘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버티면 더 일하고 싶어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경력을 2년 이상은 만들고 다시 구직 시장에 나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하지만 안전하게 퇴사를 하고 환승 이직까지 성공했지만 이번 직장에서도 밤마다 찾아오는 무기력이 보내는 신호는 분명했다. 나는 퇴사가 필요했다. 사람마다 퇴사를 선택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다르겠지만 나는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잘할 수 있고,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 일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었다. 일하는 의미가 흐려진 채 일하는 시간이 삶을 흔들었다.


첫 취업 준비를 할 때는 오로지 내가 들어갈 자리가 한 자리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늘에서 일자리가 뚝 떨어질 만큼 능력자도 못 되고, 취업 시장을 파악하거나 자소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요령도 경쟁자들보다 뛰어난 것 같지 않은 것 같으니, 자리만 있다면 일단 열정을 다하겠습니다!라는 포부로 입사했는데, 고작 1년 여만에 너무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단순히 일이 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 일을 하고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받는 보상도 즐거웠다. 하지만 일이 안정적인 수입을 벌기 위한 행위로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나는 그 이상의 의미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1년 4개월의 직장 생활, 이직 2번과 직장 3곳에서 느꼈다. 주 40시간 때로는 그 이상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노동에 쓰는데, 돈을 버는 것 말고 기대할 수 있는 성취나 배움, 즐거움 무엇이든 동력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 4개월의 시간 동안 내가 만족하는 일자리와 업무를 찾기 위해 회사 이름과 복지를 쫓아다녔던 회사도 있었고, 자율도가 높은 작업을 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던 곳도 있었다. 급여나 체계, 워라밸이 엉망이어도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치기도 하고, 칼퇴가 가능한 안정된 회사를 다니며 저녁 있는 삶이 좋다는 것도 느끼고, 야근 시간보다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료와 분위기가 많이 중요할 수도 있다는 복잡한 욕망을 확인하기도 했다.  


직장 생활의 현실은 하고 싶은 분야의 일을 하면 돈이 그만큼 따라오지 않았고, 작고 소중한 기본 급여를 받으면 그 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큰 프로젝트를 성취하고 나면 건강을 잃은 것 같고, 긴급하게 해결하는 능력은 커졌으나 과정을 차곡차곡 쌓는 능력은 놓친 것 같았다. 열심히 일하면 일이 감당하기 힘든 문턱까지 쏟아지고, 회사는 일을 늦게 못 미덥게 하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지 않고, 대신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더 맡겼다. 생각보다 체계나 보고에 구멍이 많았지만, 어떻게든 메꾸는 사람들이 있어 겉으로 보이는 상품이나 서비스에는 흠집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변 동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느 회사나 반복되는 현실이었다.


어떤 회사도 완벽할 수 없고, 각자가 견딜 수 있는 부분, 얻어갈 수 있는 무언가를 각자의 기준에 맞게 재고 따지며 회사와 노동을 교환하는 행위가 직장 생활의 기본인 줄도 모르고 너무 일을 해내는 것에 몰입한 나는 그저 열정적으로 일할 자리만 있으면 된다는 이상과 급여든, 성취든, 좋은 동료든 좋은 조건을 같이 쟁취해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 내가 버릴 것과 얻을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쉽게 방전되고 말았다.


일을 할 때는 지친 동료들이 장난처럼 퇴사를 말하기도 하고, 아직 신입이니까 퇴사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직장 생활을 해 본 1년 전과 후, 벌써 경제적인 부분이 큰 걱정거리가 되었고,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소속감이 흐려진다는 두려움도 컸다. 한국 청년 생애주기에서는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곳에 취업했다면 경력을 쌓아서 연봉을 높이는 게 일반적인 타이밍이었다. 내가 보며 자란 어른들, 10년, 20년 먼저 직장을 다녔던 사람들에게는 한 길을 정하고 나면 그 길로 길게 나아가는 삶이 선명했고, 내가 아는 어른의 모습처럼 내 삶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퇴사를 고민하는 내게 끈기가 없는 것은 아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되물어 보았다.


그러나 조급함을 잠시 묻어두고, 한 발 뒤로 물러서 바라보니 지금의 이 혼란스러움은 취업, 직장 생활로 사회에서 나라는 사람이 위치와 역할을 얻는 성장을 한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내면을 더 잘 알게 되는 성장을 같이 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 질 높은 여가 시간을 보내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어야 잘 살 수 있다는 나만의 답은 꽤 오랜 시간 고민해 왔으니 그만큼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일해야 좋을까? 에 대한 대답은 제대로 시작한 직장 생활은 처음이었으니 어떤 직장이 나와 어울리고, 나는 어떻게 일할 때 행복한지 자신에게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방황은 삶에 물음표를 붙이고 마침표를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게 꼭 필요한 과정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직장을 더 다니면서 찾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노련함이 부족한 신입이기도 했고, 주변 상황, 사람, 업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격이라 내면의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루 걸러 하루 생각이 바뀌어서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앞으로 더 오래 일하고 싶다면, 내가 원하는 근무환경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로 얻고 싶은 목표를 분명하게 알아야 했다. 중간에 또 어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 기준이나 목표가 바뀌어도 그 역시 내가 한 선택이라고 믿어줄 용기도 필요했다. 그동안 내가 해낸 일을 돌아보며 회의적인 생각을 거두고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불을 붙이는 시간을 찾아도 좋을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아직 기회는 많아!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어! 속도가 다를 뿐이야!

퇴사를 고민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퇴사를 말리는 사람보다 응원을 건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자리에서는 선택에 뒤따라 올 결과에 대한 불안함이 여전해, 그들의 응원에 깊게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많이 믿어주고 나서야 그들의 응원이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언제든 이 계절을 떠올릴 때, 텅 비어버린 나를 그대로 밀어붙이는 대신 어떤 것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더 들여다보는 시간을 선택한 용기를 두고두고 잘했다고 생각할 것 같다. 경력이 더 쌓이면 버리고 취할 것이 또 변하겠지만, 그때는 내 선택을 오래 의심하지 않고 조금 더 빠르게 믿어줄 것이다. 이번에는 크게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오래오래 타오를 수 있도록 다시 마음에 불꽃을 심고, 일을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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