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자 원래 성격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평생을 지레짐작 잃어나지 않는 일들을 노심초사하며 살았던 게 쉽사리 없어질 리 없다. 당장 안 해도 되는 일이라 치부하기엔 날짜란 놈은 하루 이틀 지나가서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게 된다.
9월 추석이라는 행사는 옵션이고 당장 독서지도사 시험이 3주 뒤에 치러진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식은 죽 먹기지만 책은 책장에 꽂아두어 볼 때마다 고구마 백개 먹은 느낌이었는다. 이제 그 고구마를 꺼낼 시간이다. 시험이 붙고 안 붙고는 노력에 따라 달라지니까 어떻게 해 볼 도리는 나에게 달려있다.
독서지도사 시험을 치르고 이틀 뒤 사회복지사 실습을 한 달간 나간다. 스케줄 한번 잘 짰다고 셀프 칭찬을 했지만 실습일이 다가오자 걱정이다. 행여 아이들이 아프거나 특별한 이벤트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고 둘째 아이 유치원 하원시간이 실습 시간보다 한 시간 빨라 하원도 고민이다.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려보지만 좋은 대안은 떠오르질 않는다.
걱정거리는 걱정일 뿐 늘 하던 새벽 수영은 루틴에 맞게 5시 20분 알림이 울리면 기계처럼 벌떡 일어난다. 꾸무덕 거렸다간 샤워시간에 줄을 서는 일이 발생한다. 여름 수영강습은 보이지 않는 전쟁터이다. 더워서 많이 오고 몸매를 위해서 오기 때문에 새벽에도 만석입니다를 외쳐본다. 탈의실이 덜 붐빈다. 월초에는 강습생이 제일 많은데 사람이 별로 없어 물어보니 다들 휴가 갔다며 강습이 쉴세 없이 빡빡할 거라고 귀띔을 해준다.
연거푸 마셨던 맥주가 문제인지 똥배도 앞으로 더 뽈록하니 아주 든든하구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샤워장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씻으며 잡담을 한참 해도 쉬이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정신이 빠싹 들려면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체조가 제맛이다. 몸풀기와 뜀뛰기로 열감을 올려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8명이서 강습을 받다 2명이 이탈해 나갔더니 개인레슨 수준으로 봐주신다. 이런 사명감에 물개박수가 나와야 할 텐데 얼굴이 불타오르고 상대방의 얼굴이 씨 벌게져서 웃음이 나왔다. 강습이 유난히 힘들었다며 초보반부터 5개월 차 함께했던 샛별반 왕언니가 커피를 쏘겠노라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1층카페로 모이라고 했다. 첫째 아이가 개학이라 마시지 말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순간 옷장에서 얼굴이 빼꼼 나와 도망가려고 했지? 꼭 1층 카페로 오라고 왕언니는 당부를 했다.
그렇게 샛별반 여자 네 명이 모였다. 왕언니가 사주는 커피를 마시며 처음으로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며 언니는 이름이 어려우니 잘 저장하라고 했다. 새벽반은 씻고 나가기 바빠서 커피는 고사하고 서로 이름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아줌마들의 호흡을 따라갈 재간이 없지 않겠는가 물 흐르듯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내가 카페를 하고 있다는 것과 접으려고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줌마의 정보력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소름이구나 싶다.
왕언니는 친절하게 그럼 뭐 하려고 그래?라고 물었고 별생각 없이 독서지도사 시험 보고 사회복지사 실습 나갈 거라고 줄줄이 비엔나처럼 말이 수루룩 나왔다. 말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 입이 방정이다 싶은 찰나 왕언니는 실습 어디로 나가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커피 한잔에 뭔 정보를 이렇게 다 알아가나 싶을 정도로 나에게만 집중된 질문에 당황스러웠고 대답을 안 하는 것도 이상해 아동복지센터로 나간다고 말했다. 센터 어디야? 이름이 뭔지 알려달라는 왕언니가 점점 부담스러워 어깨가 뒤로 빠졌다.
왕언니는 그제야 나 사회복지사라서 반가워서 그래라고 말하자 반대편에 있는 수강생도 어! 나도 사회복지인데라고 말이나 왔다. 한 집 걸러 한집이 사회복지사인가요? 친한 지인 중에 사회복지사 일이 힘겨워하기에 실습을 나가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말하며 나무아동복지센터고 센터장님 이름이 이루다라고 대답했다.
온 우주의 행운은 네 것이다
그 순간 왕언니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혹시 문자 받은 거 있으면 실습지도자가 누군지 찾아보라고 했다.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실습지도자란에 이루다 센터장님과 커피를 시원하게 쏴주신 왕언니 이름이 쓰여있었다. 세상 좁고 이렇게 만날 수도 있나 서로 5개월간 알몸을 공유한 사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실습 당일에 만났다면 얼마나 황당했을까 새벽수영을 하는 큰 그림이 이렇게 완성되는구나 싶다.
올여름휴가 때 유니콘을 타고 놀았는데 행운의 말을 잡았나 보다. 나의 모든 날 윤슬이 빛나듯 행운이 반짝반짝하길 바라본다. 아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