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by 소로

밀린 설거지가 싱크대에 수북이 쌓여 가고 있다. 몇 끼째인지, 며칠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더미는 이제 작은 산이 될 모양새다. 나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한 채 방과 방 사이를 오가곤 한다. 집안 정리는 대충이라도 해내지만, 이상하게도 '설거지'만큼은 끝없이 뒤로 미루게 된다. 설거지가 차곡차곡 쌓인다는 건, 사실 내 마음속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머릿속에 고민이 켜켜이 얹히듯 싱크대에도 그 잔해들이 쌓여 간다.


고민을 앉고서 집으로 들어오는 날이 있다. 하루살이의 일상에 어떤 삐걱거림이 느껴질 때면, 나는 괜히 처연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들어서게 된다.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홈 스윗 홈'을 외치며 보금자리의 안온함을 누려야 하지만, 정작 나는 근심덩어리들이 잔뜩 묻어버린 신발을 신고서 그대로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세수를 할 때도, 잠깐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도, 잠이 들 때에도 그 신발은 내 발에 신겨져 있다. 그리고 신발을 벗지 못하고서 며칠을 버티는 동안, 싱크대의 설거지는 그렇게 쌓여가는 것이다.


그날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뜻밖의 삐걱거림을 여러 번 느낀 날이었다. 작은 어긋남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잦은 요즘, 그런 신호가 포착되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아마도 경험이 쌓이며 생긴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 던져놓은 진흙 잔뜩 묻은 신발을 신은채, 혼이 반쯤 빠진 유령처럼 집 안을 서성거린다. 실망감이 큰 파도처럼 밀려와 머릿속이 아득해짐 느낀다.


그러던 오늘, 다른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그의 말과 태도에 자연스레 스며들었고, 그 순간 마음속의 먼지들이 서서히 가라앉음을 느꼈다.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의 말결은 잔잔한 물결처럼 와닿아 마음에 붙어 있던 잔 때들을 슬며시 털어냈다. 무언으로 전해지는 어떤 온기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온기가 나를 다시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를 조심스레 점검하고 정리해 보게 된다. 그의 말과 태도를 떠올리다 어느새 흐려진 나를 찾아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쌓였던 헝클어짐이 풀리자 더 이상 진흙 묻은 신발이 내 발에 신겨져 있지 않았다. 오래 붙어 있던 회색빛 감정들도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지고 나니 비로소 집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며칠째 피하듯 지나쳐 온 싱크대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싱크대로 걸어간다. 그 앞에 잠시 서서 어떤 그릇부터 씻어낼지 조용히 순서를 그려본다. 손잡이를 돌려 뜨거운 물을 틀자, 따뜻한 물줄기가 싱크대를 두드리며 내려앉는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수증기가 은근히 피어올라 내 얼굴 가까이에서 맴돌다 살며시 콧깃을 스친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위로 겹겹이 포개진 그릇들을 조심스레 들어 하나씩 물속에 담근다. 뜨거운 물에 기름막이 부드럽게 풀리며 물과 함께 흘러 내려간다. 스펀지를 들어 물속에 담근 뒤 세제를 묻혀 풍성한 거품을 만든다. 물 위로 떠오른 작은 거품들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설거지를 시작한다.





나를 흐트러뜨리는 사람, 나를 다시 매만지게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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