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언어로
양육자라는 표현이 맞다.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꼭 학부모와 같은 엄마나 아빠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모와 함께 살거나 조부모님들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 다양한 형태의 가정에서 또는 공동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그렇기에 돌보는 삶을 표현할 때 양육자가 맞다. 우리는 양육자이다. 아이들의 양육자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양육자이기도 하다. 아이들도 양육자이다. 스스로의 양육자이다. 모두가 양육자인 것이다.
어린이집을 믿어주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봄 중인 선생님들의 돌보는 삶을 존중해줘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들 개개인도 또 어린이집도 또 보건복지부도 또 중앙정부도 제주도청도 서귀포 시청도 양육자이다. 가장 아름다운 존중은 믿음이다. 걱정을 털어놓고 비판하지 않는 소통이 가능한 믿음이다. 암묵적인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걱정되는 건 소통해서 확인하고 또 집에서의 소식을 어린이집이라는 양육자에게 전하고 나만 고객이 되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또 아이들의 적응을 믿어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믿어주는 만큼 자라나는 양육자들이다.
우리들은 돌보는 삶을 사는 양육자들이다. 사회는 반대로 우리들을 '경력단절여성'이라고 말한다. 가족을 위해 살림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을 '논다'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표현 방법을 바꿔야 한다. '경력보유여성'+'양육자'='슈퍼양육자'다. 생명을 돌보는 경력은 수치화할 수 없는 공감능력을 가졌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일은 ‘온살림’이다.
아이를 하루종일 어린이집에 맡긴다고 표현하며 일을 하는 엄마는 '돈 버는 죄인'이 된다. 일하면 일한다고 죄스럽고 돌봄 하면 돌보기만 한다고 죄스럽다. 데체 어쩌란 말인가? 문제는 양육자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돌봄과 일의 균형을 찾아주는 일터는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돌보는 삶은 외부에 사회에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해야 한다. (1) 먼저 양육에 대해 생각하는 언어를 바꿔야 한다. 아이를 양육하는 정체성에 대해 정리해야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표현들을 한다. 뭘 그렇게 하늘로 하늘로 키워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키움이 아니라 ’ 서로 돌봄‘이다. 잘 생각해 보면 아이가 우리들을 돌봐준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는 표현은 돌보는 삶에 피해의식을 줄 수 있다. 돌봄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이 아니라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가 된다. 이제 양육자의 존재는 이혼의 불씨가 된다. 제발 제발 키우지 말고 아이가
나를 돌보아주고 있다는 걸 인정하길 바란다. 아이와 함께 서로 돌봄의 이유는 아이가 자신의 삶과 사회를 위한 독립을 하는 것에 있다. 아이가 점점 스스로 해내고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야 건강하다. 서로 돌봄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돌봄이다. 그동안 돌봄이 아닌 스스로와 아이에게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가스라이팅을 한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좋은 엄마의 기준을 지우개로 지워야 한다. 자신이 자신의 아이에게 해준일 내 아이 시월드이야기만 하며 허영을 떠는 전업 육아허영 모임에서 당장 나오는 등 그러한 분위기가 생길 때 발길을 돌리는 용기를 내야한다. (2) 내가 나를 돌보는 삶에 시간을 사용하면서 꾸준히 돌보는 삶을 돌봄 하는 일을 연금으로 쌓아가야 한다. 각자의 ’ 돌보는 삶은 어떻게 살릴 것인가 ‘로 하나가 되어 소통하고 함께 밥 해 먹고 또 다른 나들과 내 삶을 디자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