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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악의 하루>

남산 로망 가득한 영화

by 니니


줄거리

영화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제목처럼 주인공 은희(한예리)가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 남자 친구 현오(권율), 잠시 만난 적 있는 유부남 와 이혼남 사이의 운철(이희준). 이 세 사람을 만나며 벌어지는 하루의 이야기다.


줄거리가 간단하다고 해서 이야기가 단조로운 것은 아니다. 은희가 만나는 세 남자의 캐릭터는 모두 독특하다. 때문에 은희는 함께 있는 상대에 따라 말투도 표정도 다르게 대한다. 이 영화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한예리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료헤이
료헤이와 은희의 첫만남
거짓말을 만드는 일을 해요.

극 중 (그리 유명하지 않은) 소설가인 료헤이는 비즈니스차 온 한국에서 약속 장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란히 한 곳을 보던 은희에게 서툰 영어로 길을 묻게 된다. 은희 역시 얄팍한 영어 실력으로 친절하게 앞장서서 길을 찾아 준다.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선 장소인 서촌 골목길을 헤매며 낯선 언어로 교감하는 두 사람을 보는 일이 참 흥미롭다.


현오
현오와 은희
도무지 거짓말 빼고는 대화가 안되니까 내가 널 못 믿는 거야


꽤 오랜 연인 사이로 보이는 현오와 은희는 친구 같기도 하고 티격태격 싸우는 귀여운 연인 같기도 하다. 현오는 이제 조연배우로 데뷔를 한 신인 배우다. 그럼에도 자신을 알아볼 사람들을 과하게 의식하며 은희의 기분을 건드린다. 현오와 있을 때 은희는 시크하기도 하고 조금 짜증을 내기도 하며 편안하게 그를 대한다. 자신을 보러 먼길을 걸어온 은희에게 고생했다는 가볍게 말을 던지곤 끝까지 자신을 향한 시선만 신경 쓰는 현오. 꼴에 연예인이라고 설치는 그 걸 보자니 아니꼽기도 하고 괜히 애교를 부리고 싶기도 하다. 현오가 애지중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사수하는 꼴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은희는 꼭 미운 정 고운 정 다든 연인의 모습이다.


전 행복해지지 않으려고요.

현오와 싸운 채로 남산을 내려오는 은희는 우연히 전에 잠시 만났던 운철을 만난다. 이혼남인 줄 알았던 유부남과 있을 때 은희는 조신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현오와도 싸웠겠다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운철과 뭔가 잘될 것 같다는 감을 잡은 은희는 조금은 여우같이 상처받은 척 연기한다. 운철은 뭐랄까... 찌질한, 구질구질한 남자다. 사실 운철과의 시간은 극 중 제일 재미있는 장면이기도, 제일 어이없는 장면이기도 하다. 운철은 이미 정리했다는 은희를 붙잡고 자신이 은희와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고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구구절절 말한다. 그와 대화를 이어갈수록 그의 찌질함에 은희보다 보는 내가 더 질리는 기분이었지만 사실 우리의 삶이 늘 쿨함보다는 찌질함이 대부분인 걸 알기에 한편으로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재결합을 하기로 했다는 운철은 아무래도 은희를 자신의 어장에 가두고 싶은 모양이다. 말을 듣자 하니 가관이다. 은희는 결국 운철과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다시 남산 산책로, 은희는 결국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그리고 지친 하루를 보내는 은희의 곁에 료헤이가 나타난다.


생동감 있는 은희의 이야기는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오묘해진다. 영화는 서촌의 골목길과 료헤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료헤이는 자신이 여행지에서 떠오른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곤경에 빠진 여자의 이야기.


료헤이가 한국 여행 중에 만난 은희와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내레이션을 생각하면 료헤이와 은희가 나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료헤이가 한국을 여행하며 혼자만의 시간에 문득문득 떠올리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자에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긴 하다.

걱정 마세요.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자신을 팬이라고 자처한 기자는 료헤이에게 그가 소설 속에서 인물들을 위기에 처하게 하고서 구해주지 않기에 너무 잔인하다는 말을 한다. 료헤이는 소설은 이야기일 뿐이고 자신이 이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답한다. 기자는 되묻는다.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료헤이는 기자와의 대화가 끝이 나고 은희가 말한 남산으로 가서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를 불러낸다. 그리고 낯선 곳, 눈이 내리는 추운 날의 그녀에게 해피엔딩을 선물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인 은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녀에게 해피엔딩을 선물하며 지금까지와 다른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럼 저랑도 연극을 하는 건가요?

극 중에서 인물들은 일본어, 한국어, 영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한다.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은희와 료헤이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유창한 언어로 대화한다. 하지만 대화 내용을 보면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다. 말이 출판 기념 회지 아주 초라한 자리를 준비한 편집자, 이제 출판사를 닫아야 한다는 소식, 남자 친구와 다툼만 이어가다가 이별을 이야기하게 되고, 결국 아내와 재결합하게 된다는 전 남자 친구의 말. 모두 원활한 대화가 가능하지만 실은 서로 일방적인 이야기만 한다. 하지만 료헤이와 은희가 나누는 대화는 다르다. 두 사람은 영어실력은 형편없지만 서로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가장 기본적인 단어로 만들어 낸 대화는 더 진실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는 특이점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사람은 소설가라는 직업도 배우라는 직업도 모두 거짓말을 만드는 직업이라고 표현한다. 은희는 자신이 거짓말을 많이 한다며 문득 내뱉은 대사가 참 좋기도 했다.


'요즘은 살고 있는 게 연극이에요. 근데 연극이라는 게 할 때는 진짜예요. 끝나면 아니고...'

처음 영화를 보면서 시시때때로 태도가 변하는 은희를 보면서 어느 모습이 진짜 은희의 모습일지를 계속 생각했었다. 그리고 료헤이와 있을 때의 은희가 진짜 은희의 모습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희 말을 듣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도 그 순간만큼은 솔직했다면 그 역시 자신이고 또한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대도 해피엔딩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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