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나의 적으로서의 나 (1)

불안하고 강박적인 바보가 자신과 싸우면서 사는 법

나는 대체로 나를 들볶으며 사는 편이다. 나는 나를 들볶고 그래서 나는 나에게 들볶인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빽빽한 스케줄을 만드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다. 정반대다. 나는 계속 주저하고 고민하며 뭔가 따지면서 나를 들볶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표면에, 이상하게 늘 지쳐있는 내면을 가지고 있다.


내 성격을 알고는 있었지만, 얼마 전 또 나에게 들볶이는 바람에 더없이 행복하던 사람이 단 몇 시간 만에 불행에 처박히는 걸 보고 나서 '이것도 참 재능이다' 싶어졌다. (반어법입니다.) 그래서 난 여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주 금방 불행해지는 (바보 같은) 재능.




저녁 7시의 행복이 새벽 1시의 불행이 되기까지


10월에 갑자기 예정에 없던 휴가가 생겼다. 그간 너무 많은 업무에 치이며 살았고, 주말까지 합친 이번 6일의 휴일이 2년 만에 가장 길게 쉬게 된 기간이었다. 이 휴일은 어느 날 점심을 먹다가 갑작스럽게 정해졌는데, 아무래도 연말에 바빠지기 전에 쌓여있는 연차를 소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면서, 나는 갑자기 급하게 그다음 날부터 연차를 쓰게 된 것이다.


갑자기 내일부터 연차라니! 주말까지 합치니 6일이나 자유!!


난 너무 신나고 들떠서 그날 오후 사무실에서 실실 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일하는 틈틈이 제주도 비행기표를 검색했는데, 주말엔 표가 없었고 오히려 당장 다음 날 떠나야 했다. 못 가게 된 공연을  티켓부터 취소하고 제주도 숙소를 검색했다. 숙소만 있다면 난 당장 떠날 수 있었는데, 정말 숙소가 하나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대체공휴일이 붙은 황금연휴인데 하루 전날 검색해서 제주도에 무슨 숙소가 있단 말인가. 친구들에게 갑자기 생긴 휴가 얘기를 하니 이런 숙소도 있다며 링크를 보내주었는데 대부분 예약을 걸면 방이 없다며 금방 취소처리가 되었다.


나는 퇴근하고 집에 7시에 들어와 노트북부터 열었다. '저녁을 먼저 차려먹고 검색을 시작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지만 일단 어디든 맘에 드는 숙소, 여행지를 찾아서 여행 계획을 세워놓고 밥을 먹고 싶었다. 당장 다음날 떠날 계획이었으니 마음이 더 급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나는 그날 저녁 7시쯤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6시간 가까이 화장실도 안 가고 저녁도 안 먹고 물도 안 먹고 꼼짝없이 앉아서 계속 숙소만 검색했다. 새벽 1시에 마침내 어느 여행지의 숙소를 결정하고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숙소가 없어서 여행은 3일 뒤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퇴근할 땐 룰루랄라 아주 행복하게 집에 들어왔던 내가 지금은 아주 불행해졌음을 깨달았다. 너무 피곤했고 힘들었고 이번 여행에 이미 질려버렸다고 느꼈다. 거기에 더해 휴가의 첫 날인 내일 컨디션에도 이미 망조가 들었다.




나는 괴로운 프로고민러다


물건을 살 때 너무 많이 비교하고 따지고 고민 고민해서 사면, 정작 구매 후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히려 대충 알아보고 큰 고민 없이 구매한 물건들에 대해서는 만족하기가 더 쉽다고 한다. 계속 고민하는 사람은 이렇게 해서 내 맘에 더 쏙 드는 것을 찾아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간과 에너지를 쓴 그 과정 자체가 모두 비용인 것이다. 긴 과정에서 계속 그 물건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막상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아주 완벽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오히려 투자한 비용 대비 상대적인 만족감이 뚝뚝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늘 그 이야기를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잘 되지가 않는다. 생각건대 갖고 태어난 불안과 강박 기질 때문인 것 같다. 일상생활에 아주 지장을 줄 만큼은 아닌, 약한 수준의 그러나 잔잔하게 늘 존재하는. 그러다 가끔 이런 이벤트가 생길 때 그게 나를 좀 이런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사람... 물도 밥도 안 먹고 다리도 안 펴고 집요한 검색만 6시간 하는 사람. 그리고 당장 내일의, 휴일 첫 날을 망치고 시작하는 사람.




나의 불안, 나의 강박


대체 무얼 했길래 6시간이나 지났는가.

'그렇게나 방이 한 개도 없었나?'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내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말해보겠다.


제주부터 시작해 군산, 전주, 경주, 인천, 파주, 춘천, 강릉, 서울까지 온갖 지역의 온갖 숙소를 검색했고,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의 남은 룸 종류를 확인하고 리뷰까지 훑으며 과연 이곳이 적당한 숙소일지, 나의 완벽한 휴일을 망치지 않을 곳인지 면밀히 판단했다. 그 와중에 교통편도 따져봤고 청소상태가 안 좋다는 리뷰가 있는 곳은 제외했고 인테리어가 끔찍한 숙소들도 패스했다. 조용히 쉬고 싶었으니 '파티' 같은 소리가 쓰여있는 게스트하우스도 당연히 제외했다. 물론 대부분 가고 싶은 숙소들은 다 예약이 찼으므로 난 원하는 숙소를 구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교통편도 따졌던 건 내가 버스와 택시를 싫어하고 지하철과 기차 등을 선호하기 때문인데, 그것도 결국 내 예기 불안과 관련이 있다. 돈을 좀 더 써서 호캉스를 할까 하며 호텔도 열심히 검색해보았으나 방이 남은 곳은 너무 비쌌고 가격이 적절하면 방이 없었다. 그렇게 6시간을 집요하게 전국 각지의 여행지 숙소를 알아본 끝에, 맘에 드는 숙소를 골라 (날짜만 어느 정도 타협한 채) 예약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꼼꼼한 사람들은 여행을 앞두고 폭풍 검색을 해서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괴로운 건 ‘다음 페이지, 다음 키워드에는 분명 맘에 드는 숙소가 나타날 거야!’하는 생각에 6시간을 화장실도 안 가고 검색 지옥에 빠져있던 나의 집착이다. 심지어 마지막에 결정한 숙소도 훨씬 일찍 찾아낸 곳이었는데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예약을 실행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


난 대체 왜 이렇게 적당히를 모르고 날 피곤하게 만들까 생각했다. 자정이 넘었지만 배가 고파 밥을 먹었고, 씻고 소화시키다 보니 결국 새벽 5시 반에 잠들었다. 다음 날, 숙소에 예약금을 입금하기 위해 9시에 눈을 떴다. 하루 종일 피곤할 것 같아 좀 더 자려고 했지만, 이번 여행지가 처음 가보는 지역이라 괜히 불안하기도 설레기도 해서 이번엔 맛집과 명소를 검색하다 잠이 달아나버렸다. 어젯밤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린 검색 지옥은 이튿날 오전까지 계속됐다.


오후 늦게 침대에서 빠져나올 땐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나빴다. 난 좋은 여행도 원했지만 휴가의 첫날을 이렇게 피곤하고 지친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휴가는 내가 망치고 있었고, 이미 하루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


- 나의 적으로서의 나(2) 편에 이어집니다. -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