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의 적으로서의 나(2)

불안하고 강박적인 바보가 자신과 싸우면서 사는 법

- 나의 적으로서의 나(1) 에서 이어집니다. -




불행한 결과를 만든 단추들


난 왜 이렇게 어리석게 굴었나?


망한 첫 번째 단추. 일단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회사 업무가 과중하여 그동안 길게 쉬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6일 연속 휴무가 너무 소중했다. 진짜 잘 보내고 싶었기에 나의 무의식은 완벽한 휴일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목표를 세운 이상 나 자신의 높은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불안한 요소들은 모두 제거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면 숙소의 청결상태에 대한 리뷰, 비선호 대중교통 동선 등) 그 결과 강박적인 무한 검색 메들리가 시작됐다.


망한 두 번째 단추. 피곤해진다. 이게 무슨 휴가인가 현타가 오기 시작한다. 나도 이런 내 성격이 너무 싫다. 후회가 밀려오며 내가 싫어진다.


망한 세 번째 단추. 후회와 자책은 다음날 눈을 떠도 도통 끝날 생각이 없었다. 아침부터 어제의 실수를 자책하며 우울하게 어제 하던 일의 연장선인 검색 지옥에 또 빠진다. 그리고 이것도 다시 내 자책 거리가 되었다! 자책해서 우울해진 나를 내가 다시 자책한다! 자책의 무한루프~!


사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나다. 나의 가장 큰 빌런, 내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 나는 나랑 싸우는 게 제일 괴롭다.


나는 대체로 이런 강박이나 집착을 적당한 수준에서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있으면 이렇게 안 살았겠지.)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를 테면 아이패드가 너무 비싸서 사지도 포기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인들의 의견을 구하고, 유튜브의 온갖 리뷰 및 비교 영상 영상을 섭렵하며, 하루에 천 번씩 애플스토어와 당근마켓과 각종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잠도 안 자고 기종별 가격비교를 해대고, 아이패드를 어떻게 활용하면 돈이 안 아까운지 소개해주는 블로그와 유튜브 영상을 찾아다닌다. 한 번 시작하면 적당히를 모르는 통에 잠을 못 자고 다음 날을 망치며 기분이 우울해지고 주말이 망가진다. 그러면 또다시 자책의 자책 무한 루프가 시작된다!




이미 망한  = 이미 망한 . 그냥 흘려보내자 


‘안 망할 수는 없는데, 최악만은 면하자.’

이 정도가 나에게 가능한 현실적인 수준의 목표라고 본다.


휴일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어쨌든 연차 첫날은 전날부터 이어진 나의 과오로 망쳐졌다. 피곤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로 오후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다만 꼭 바깥에는 나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뒤늦게 지하철을 타고 옆 동네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열고 한참 동안 그날의 일기를 썼다. 자책 중인 그 모든 과정을 두어 시간 일기에 쏟아내고 나니, 그제야 조금은 날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너도 잘하고 싶었겠지. 하는 생각.

지나간 건 매몰비용... 그만 냅둬라... 하는 생각.


그리고는 내가 조금 불쌍한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스스로 너그러워지자 조금은 편안해졌다.


물론 바보 같은 짓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번엔 여행이었고 이번엔 아이패드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음 달엔 또 어떤 이유든 내가 나를 들볶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어떤 이유로 내가 너무 싫어져 자책이 다시 자책을 불러오고 자책의 눈덩이가 산사태를 일으키려고 할 때, 즉 최후의 순간 나는 그냥 그 모든 걸 매몰비용으로 묻어버리고 나를 그럭저럭 용서해주려고 한다. 무한루프를 빠져나오는 방법은 손절뿐이기에.




자책하는  마음 돌리는 


자괴감의 구덩이를 파다가 갑자기 나를 용서해주기가 쉽지 않다. 특히 자책의 무한루프로 얼마나 많은 시간 낭비를 했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 이 시점부터 모든 다 잊어줘야 하는데, 그게 참 말만 쉽지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모든 게 다 쟤 때문인데 갑자기 뾰로롱 용서라니. 그래서 이런 용서는 어느 정도는 모든 걸 하얗게 불태운 후 넉다운이 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분명 그런 용서가 가능해지는 순간들을 난 기억 한다. 내가 좀 안쓰럽게 느껴질 때. 나도 이런 나라서 참 고생이다 싶을 때. 그럴 때는 그냥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나아진다. 거기에 더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예를 들어 이 휴가가 나에게 너무 중요한 휴가였다는 사실 등) 원인을 같이 이해해보면 효과가 더 좋다.


"이미 많은 바보 같은 짓을 했지만 어쩌겠냐. 너도 참 고생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면 되는 것 같다.


요즘 들어서 하게 된 생각인데, 상황에 따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곧 ‘사랑'과 같은 뜻일 때가 있다. 특히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가 당신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며 "불쌍하다"고 아파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곧 그를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의 ‘불쌍하다’에는 어떤 뜨거움이 들어있어서, 몹시 괴롭던 마음을 한 번에 풀어지게 하기도, 녹아버리게 하기도 한다.


아니, 그리고 솔직히 바보에겐 이 얼마나 살아가기 팍팍하고 험한 세상인가? 내가 항상 좋은 선택을 하진 못하지만 그런 나를 계속 힐난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니 이미 많은 바보 같은 짓을 했지만, 너른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주기로 결정한다. 아이구 이 불쌍한 것...








Epilogue


막상 떠난 여행은 그렇게 너무 좋지도, 그렇게 너무 안 좋지도 않았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는 택시기사를 만나기도 했고, 혼자 돌아다니면서 구경한 여행지 분위기는 예상보다 더 쓸쓸했다. 가게들은 자꾸 문을 닫아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돌아와서 2주 정도가 지난 지금은 대체로 다 괜찮았다고, 그렇게 대략적으로 기억한다.


다음에 또 갑자기 떠날 여행이 생기면, 조금만 더 느슨한 마음으로 가보자고 생각해본다. 여행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면 차라리 일정을 짧게 잡고 휙 다녀오는 게 어떨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적으로서의 나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