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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앞에서 하는 말들 (4)

불쌍하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뜻일 때

셋째 날 정오에 입관식이 있었다.


영안실과 붙어 있는 그 공간은 조금 추웠고 할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차가웠다. 장례지도사가 한 명씩 할아버지에게 인사할 시간을 주었을 때, 엄마는 마지막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내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했잖아.”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울어버렸다.


돌이켜보면, 외할머니는 늘 엄마에게 불쌍하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건 맞는 말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엄마는 결혼한 뒤에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엄마는 남편과 멀리 떨어져 살며 혼자서 애도 키우고 돈도 벌어왔다. 돌이켜보면 이혼을 안 했을 뿐 애가 둘 있는 싱글맘의 삶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방끈이 길었던 엄마는 과외 선생으로 돈을 벌었고, 수업이 끝나면 매일 밤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종종 우리 집을 돌보던 외할머니는 "너희 엄마 힘들어서 어떡하니"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할머니는 늘, 엄마를 애달파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직접 엄마가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에 조금은 놀란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우리 엄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진창처럼 느껴질 때, 내 부모가 '네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말해준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엄마는 그 말을 끝내 동아줄처럼 붙들고 살다가 아버지와 헤어지는 날 그 말을 떠올리며 울어버린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불쌍하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난 ‘불쌍하다’는 말을 조심해왔다. 불쌍하다는 말이 항상 누군가를 동정하는 맥락에서 쓰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부로 남을 동정하는 건 내심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는 오만한 확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길에서 마주치는 누군가의 행색을 보고 함부로 불쌍하다고 말한다거나. 이런 맥락을 제외하고선 ‘불쌍하다’는 말의 쓰임에 대해 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그날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해준 말, 할머니가 늘 엄마에게 하던 그 말이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상대를 안타까워하고, 애달파하고,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전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이었음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그가 세상에서 제일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이 드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가톨릭의 기도문에는 "우리를/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날 불쌍히 여기라는 말을 '내가 잘못을 해도 날 용서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니 날 지옥불에 떨어뜨리지 말라고...) 날, 그 종교적인 발화는 내게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왔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힘든 나를 불쌍히 여겨주는 부모가 곁에 있는 감각을, 신에게서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내게 그런 위안과 안전함을 달라는 그런 말은 아니었을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의 손가락에는 엄마가 보낸 묵주가 끼워져 있었다. 끈으로 꽁꽁 쌓여 할아버지는 관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은 마지막 날, 발인이었다. 절차에 따라 할아버지를 모시고 성당으로 이동해 장례미사를 드렸다.


서울시립승화원, 흔히 말하는 벽제 화장장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우리는 이곳 저곳을 이동하며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게 챙겼다. 나는 이렇게 수많은 죽음이 동시에 있다는 것, 그에 따라 더 많은 유족들이 장례 절차를 밟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몸이 한 시간 만에 한 무더기의 재로 변해버린다는 사실 같은 것에 조금씩 충격을 받으며 장례 절차를 밟아 나갔다. 최종적으로 할아버지를 납골당에 모신 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모든 절차를 마쳤다.


물론 할머니집에는 정리할 많은 물건과 유품들이 그대로 있었고, 미처 끝내지 못한 애도와 깊은 상실도 함께 남아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떠나고, 그의 흔적들이 우리 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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