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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앞에서 하는 말들 (3)

우리 각자의 이별

우리는 4일장을 치렀다. 엄마가 장례미사를 하길 원했는데 성당에서 일요일은 장례미사가 없다고 하여 발인을 월요일로 정한 것이다.


이튿날 새벽에 빈소가 차려지고 장례지도사가 장례 절차를 설명하며 말했다. 

"호상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기도 했지만, 부모님을 잃은 입장에서는 좋은 상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호상이라는 말은 불효이기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장례절차는 죽은 이를 위한 것만큼이나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남은 자들에게도 슬픔을 소화할 시간과 의식이 필요했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3일 내내 많이 울었고, 눈물 닦고 밥도 먹었다. 수다도 떨고, 간간히 웃음도 터지고, 또 침묵하고, 가여워하고, 한숨 쉬고, 또 울었다. 친척들을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쩌면 조금은 명절 같기도 했다.


첫 번째 문상객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외삼촌 할아버지였다. 외할머니는 이제 할아버지가 된 막냇동생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진 씨만 살았어!"


진 씨란 외할머니를 포함한 5남매를 말하는 것이다. 탁월한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은 진 씨 5남매는 모두 살아계시지만 불행히도 모두 배우자와 사별하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5남매 중 배우자가 살아있는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했는데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정말로 진 씨만 살아남은 것이다. 외할머니는 장례식장에 앉아 형제들이 문상을 올 때마다 "진 씨만 살았어!"를 반복했다. 노인들이 하는 블랙 유머엔 쪼렙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어,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장례식장에 앉아 시간이 많이 남다 보니 평소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듣게 되었다. 할머니의 어머니, 즉 나의 외증조할머니의 교육열에 대한 이야기는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덕수궁에서 선을 본 이야기는 삼우 미사가 끝난 날 유품을 정리하며 들었던 것 같다.


그 밖에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왜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을 진작에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후회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한 사람이,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아는 또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어쩐지 이 생각을 하면 슬퍼졌다.





나는 장례 절차와 마찬가지로 기도의 행위도 누군가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기도를 하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생 이후로 성당에 발길을 끊은 나는 성당 연령회 봉사자들이 가져다 놓은 명패에 있는 문구가 몹시 위로가 되어서 3일 동안 종종 읽곤 했다. 나중에 장례미사 때 보니 그건 장례미사에서 쓰는 기도문이기도 했다.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신을 믿지 않는 주제에, 영원한 빛이라는 것이 할아버지에 비추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무신론자이면서 염치는 좀 없는 편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 할아버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속의 할아버지는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병원 밥상을 받았는데, 병원 밥이 싫다며 비빔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꿈에서 깬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나 보다 생각했다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떠난 듯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아주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4일간 우리 각자의 이별을 하고 있었다. 눈물과 한숨과 회한과 슬픔으로, 또 이야기와 웃음으로, 위로로, 회상으로, 침묵으로, 기도로, 생각으로... 거기에 각자의 이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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