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게으름뱅이 청개구리의 삶

낡고 지친 물건처럼 느껴지는 하루

내가 태어날 때 짊어진 인생의 짐 중 가장 고약한 짐을 두 개만 꼽으라면 게으름과 청개구리 본능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지옥에서 온 게으름뱅이다. 게다가 고약하게도 남의 말도 안 듣는 청개구리다. 이 점을 애써 감추며 사느라 노력하고 있지만 끝내 속일 수 없었던 대상이 둘 정도 있으니 나 자신과 애인이었다. 예전에 만났던 애인은 나의 지독한 게으름과, 무엇이든 시키기만 하면 반대로 하고 싶어 하는 뼛속 깊은 청개구리 본능에 혀를 내둘렀다. 그 외에는 내가 사회적 자아를 잘 둘러쓰고 차분히 남들을 속이고 있어서, 내가 스스로 게으른 사람이라 칭하면 다들 '넌 별로 안 게으르다'고 말하곤 한다. 


*


2주 동안 회사에 붙잡혀서 야근을 하는 동안 집은 쓰레기장이 되었다. 야근 퍼레이드가 끝나고, 이번 주말 앞뒤로 금요일과 월요일에 휴가를 냈다. 총 4일 논다. 나는 먼저 화장실 청소와 밀린 빨래를 금요일쯤 해치우고 그 뒤로 편하게 게으름을 피우려고 마음먹었는데, 그중에 '게으름' 파트만 지키고 '청소' 파트를 지금 4일째 미루고 있다. 난 나에게도 청개구리라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면 대체로 그 일을 더 하기 싫어한다.


아직도 화장실 청소를 안 했다. 오늘이 휴가 마지막 날인데도 점심때 눈을 뜨자마자 대충 씻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저녁엔 집으로 돌아가 꼭 화장실 청소를 해야지 생각하며 카페에서 멍을 때리고 있다. 화장실 청소,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기 싫은지 모르겠다. 죽을 일도 아닌데 너무너무 하기 싫다.


*


죽을 일도 아닌데 너무 하기 싫은 일은 널렸다. 솔직히 말해서, 내일부터 다시 출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진다. 


나는 한 번 전공을 바꾸어 대학원에 진작했고, 거기선 글쓰기를 배웠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은 직장인으로 살기 싫어졌고, 그렇다고 글을 쓰며 살기도 싫다. 제3의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 이 청개구리를 어쩌면 좋지? 며칠 전에 트위터에 적었다. "나더러 퇴사하라고 응원해주는 건 친구와 의사 선생님. 나를 지금 자리에 주저앉히려고 설득하는 건 내 부모님..." 친구가 물었다. "너는 어떤데?"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헛소리밖에 없었다. "저는... 저는요... 인간 말고 돌멩이 같은 거 되고 싶습니다." 


세상에 일을 하지 않고 돈도 벌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늘 그 생각을 하면 언젠가 빈곤으로 인해 스스로 일찍 목숨을 마무리해버리는 엔딩을 상상하게 된다.


*


나는 사실 20대 내내 나의 게으름이 정상범위의 게으름인지 정상범위를 뛰어넘는 게으름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상담실에 가서도 물었고, 병원에 가서도 종종 물었다. "남들도 이렇게 게으른가요?" 한때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것은 이 게으름의 원인을 우울증으로 돌릴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우울증이 괜찮아지고서도 게으름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짐처럼 지고 태어난 게으름이 내게 있나 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지금의 회사가 정말로 다니기 힘들 정도로 고약한 곳인지, 아니면 다른 노동자들도 모두 비슷하게 견디고 있는데 단지 게으른 내가 이걸 견디지 못하는 건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


차라리 단순하게 게으르기만 했으면 좋았을 걸, 게으름에 청개구리 성향이 결합하여 내 성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이상해졌다.


나는 드라마를 좋아하면서 싫어한다. 서사에 쉽게 과몰입을 하기 때문이다. 과몰입 후에 오는 허전함이 싫다. 누가 재밌다고 추천해주는 드라마나 영화도 그렇게나 보기 싫어한다. 친구가 재밌다고 추천하면 "오, 그거 봐야겠네." 해놓고 죽을 때까지 보지 않는 식이다. 그렇게 청개구리처럼 살다 보니 친구들도 이제 내게 작품을 추천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아예 피하지는 못해서, 어쩌다 유튜브에서 마주치는 드라마 클립 때문에 어떤 작품에 빠져서 갑자기 몰아보고 또 보느라 몇 주씩 허비하곤 한다. 작품을 보기 전까지의 과정도 쓸데없이 게으르고, 작품에 빠져서 허우적댈 때도 인생 모든 일에 손을 놓고 무책임하게 게을러진다. 거기에 남들이 재밌다는 얘기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청개구리 기질까지. 난 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럴 거였으면 남들이 재밌다고 추천하는 작품을 진작에 보면 좋으련만. 


드라마와 영화뿐일까? 인생의 모든 결정에 있어서 누군가의 조언을 도저히 귀담아듣지 않는다. 또 결정을 했다 한들 게으르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일을 망친다. 나쁜 버릇인 줄 아는데도 고치기가 힘들다. 


*


내가 지독한 게으름뱅이와 청개구리를 내면에 품고도 20대를 버텨왔던 건, 그나마도 이를 바로잡을 열정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모든 게 엉망인 상태에서도, 무엇을 좋아할 땐 대체로 이럭저럭, 삐걱거리긴 했어도 굴러가긴 했었다. 


30대 중반인 지금, 열정은 투명하게 사라져서 흔적이 없어졌다. 딱히 좋은 것도 없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없이, 또 게으름뱅이와 청개구리로 태어난 운명을 저주하면서 또 하루를 보내고 있다. 사람이지만 물건처럼 낡고 지친 느낌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제의 목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