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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관종의 삶

내게는 발표불안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할 땐 심장이 쿵쾅거리고 목소리와 손이 떨리며 배가 아파온다. 발표나 강의, 면접을 앞두고 화장실을 두세 번 들락거리는 것은 기본 옵션이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쿵쾅대는 심장을 제어할 수 없어 결국 염소 목소리가 나와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이후로는 그만 떨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말의 내용은 뒤죽박죽이 되고 머리가 하얘진다. 그렇게 말아먹은 발표나 면접이 한 트럭 분량이다. 청소년기부터 성인인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발표불안으로 숱한 곤란을 겪어 왔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런 불안이 있는 주제에, 나는 타인에게 받는 관심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몰빵한 '관종'이다. 보통 이런 인간을 조용한 관종이라고 부르던가요...


조용한 관종이란 어떻게 탄생하는가. 강한 인정 욕구와 발표불안 같은 각종 사회공포증이 합체될 때 탄생한다. 차라리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은 욕구만 가득하다면 좋을 텐데, 불행히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모순된 욕구가 강렬하다. 눈에 띄고 싶지 않으면서 눈에 띄고 싶다니 이런 희한한 욕망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태어나 3N년째 조용한 관종이라는 형용모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조용한 관종은 갈지(之) 자로 걷는다.


차라리 내게 무대에 대한 동경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무대에 관한 나의 가장 최초의 기억은 유치원생 때다. 내가 다닌 교회 유치원에선 매년 성탄제 행사를 열었다. 선생님과 함께 한 달쯤 연습한 율동을 무대에서 선보였던 것만이 기억난다. 처음엔 키순으로 제일 뒤에 서있던 나는 연습을 하면서 선생님에 의해 가운데 자리로 옮겨졌고 중간에 혼자서만 해야 하는 간단한 동작이 주어졌다. 그것은 독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한 동작일 뿐이었지만, 나는 내가 가운데에 서게 되었다는 것과 혼자서 주목받는 동작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러나 막상 당일이 되자 따가운 조명 아래 서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뻔뻔하게 그 동작을 잘 해내기에 나는 너무 소심했다. 나는 부끄러운 나머지 연습해온 동작을 겨우 해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장기자랑이 끝난 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네가 너무 잘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봤어.


나는 그렇게 무대에서 춤을 추는 공포와 기쁨을 동시에 알았다. 그 후로도 나는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 그 동작이 못내 아쉬워 종종 그 동작을 몰래 연습해보곤 했다. 앞으로 다신 그 동작을 어디서도 선보일 일이 없는데도, 마치 다시 한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동작을 보란 듯이 잘 해낼 것처럼.


중학생이 된 나는 발레를 전공으로 해보라는 체육 선생님의 권유를 거절했다. 여러 개의 애매한 재능을 가진 덕분에 예체능의 언저리에서 기웃대던 시절이었다. 결국 공부에도 애매한 재능이 있어 무난한 성적으로 무난한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선생님이 발레를 권했을 때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내가 과연 무대에 설 수 있을까였다. 나는 며칠을 고민하고 결론을 냈다. 발레는 재밌지만 콩쿠르 같은 무대에 서는 것만은 못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고 도망치고 싶었다. 난 선생님을 찾아가 발레를 안 하겠다고, 난 미술을 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앞으로 무대에 오를 일이 없다는 사실이, 그 중압감을 견뎌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알겠다고 하면서도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한참 후 미술학원에 흥미를 잃은 나는 결국 나는 마음을 바꿔 발레를 전공하기로 했다. 한동안 발레 학원을 다녔다. 무대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을 어떤 이유로 바꾼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신입생 장기자랑과 사발식(!)을 예고한 동아리를 일주일 만에 뛰쳐나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장기자랑과 사발식이 싫어서였다. 그러곤 2학년 때 연극을 하겠다며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장기자랑은 죽도록 싫었지만 연극은 하고 싶었다.


우리는 판이 꾸려지면 방학에 두 달쯤 뭉쳐 다니며 종일 연습을 했다. 연극 동아리는 여러 모로 나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사람들 사이에 속하고 싶은 욕망, 공부 안 하고 놀고 싶은 욕망, 남에게 관심받고 싶은 욕망,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해보고 싶은 욕망. 나는 특히 마지막 부분을 좋아했다. 나는 늘 나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으니까. 무대에서 6의 강도로 표현해야 한다면 항상 3밖에 못하는 내게 연출은 말했다.

일단 10만큼 해보면 5나 6으로 깎아내는 것은 쉬워. 그건 조정하면 되거든. 근데 3에서 6까지 가려고 하면 계속 3밖에 못할 거야.

공연 일주일 전에는 갑자기 이런 말도 했다.

무대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은 없어. 아무거나 해도 돼.

남들 앞에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생각보다 짜릿했고 자유로웠다. 나는 연극이 끝나면 늘 조금은 상심했었다.


한편 그 시절 집에서 마주치던 엄마는 늘 화가 나있었는데, 내가 그 시절 대학생답게 토익 공부는 하지 않고 연극 동아리에 빠져 통금 시간만 어겨댔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온 엄마가 얘기를 하자며 뜸을 들였다.

... 그래서, 너, 뭐, 배우라도 할 거니?

침묵 끝에 나온 경멸 어린 질문에 엄마가 낯설어진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아닌데.

대답을 해놓고 깨달았다. 나는 배우는 안 할 거구나.


배우는 안 할 거지만 희곡을 쓰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대학원 시험을 보고 희곡을 쓰는 극작과에 들어갔다. 연극을 너무 좋아한, 하지만 연기나 연출에 뛰어들 용기가 없는 내게 희곡을 쓰는 일이 더 잘 맞았다. 방에 앉아 희곡을 쓰는 것은 연기나 연출만큼 창조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무대 공포증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같이 희곡을 쓰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여러 해 동안 친구들을 만나며 생각했다. 대체로 조용한 관종들이 작가가 되는구나. 나는 소수의 내 친구들을 표본으로 조용한 관종이 작가가 된다는 가설을 떠벌리고 다녔다.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소속감이 좋았다.


대학원에 다닐 때 누군가 야매로 사주를 봐주었다.

너는 안에 있는 걸 밖으로 내보내는, 표현하는 사주가 없어. 안에 차오르는 게 없는 건 아닌데, 그걸 밖으로 보내는 게 없는 거지. 그래서 오히려 이런 사주는 누구를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을 하는 게 좋아. 직업적으로 계속 밖으로 흘려보내는 일이니까.

그때의 나는 계속 글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아 조금은 안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이것은 조용한 관종의 사주가 아닐까 싶다. 안에 차오르는 건 있는데 표현을 못한다니.


조용한 관종으로서의 숙명을 가장 절실히 깨달을 때는 나의 희미한 존재감을 타인을 통해 확인받을 때다.


나는 희미한 첫인상을 가진 편이다. 한두 번 만난 사이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보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는 뜻이다. 누군가 인사를 해올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해 곤란했던 경험은 별로 없다. 거꾸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해서 상대를 곤란하게 한 적은 많다. 종종 반갑게 말을 걸었다가 상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 곤란해하면, 그제야 나는 내가 가진 희미한 인상에 대해 한 번 더 체감하는 것이다. 그럴 때 조금은 슬퍼진다. 그래도 희미한 인상이야말로 조용한 관종의 운명에 어울리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런 걸로 조금은 슬프게, 몹시 모순되게, 갈지(之) 자로 걸어대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슬프지만. 욕망을 미처 채우지 못한 채로, 항상 무언가 부족하게.

나에게서 도망치며, 다시 되돌아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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