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넓히는 일

복권이 되면 있잖아, 매일 그 통장을 꺼내어 볼 거야.

by 낮의 그늘



980원. 그것은 언젠가 내게 전달된 가스 요금 고지서의 금액이다. 그때의 나는 딱 980원어치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나의 가난은 어쩔 수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던 시기를 지나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언젠가의 끼니가 걱정이 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난방 대신 모든 계절의 이불을 전부 꺼내어 덮었다. 그래도 달달 떨리는 잇새를 꽉 깨물어야 했다. 언제는 위층 주인집이 마당에 끌어놓은 멀티탭에서 휴대폰을 충전하기도 했더랬다. 비가 오는 날엔 어쩔 수 없이 전자기기를 모두 '저전력 모드'에 맞춰두거나 과제를 핑계로 학교에서 지냈다. 그것도 마땅치 않을 때에는 차라리 감전사를 각오하고 빗속에 널려있는 멀티탭에 손을 뻗었다.


평생 수많은 거짓말을 하고 살아온 나이지만 이 시기에는 정말 거짓말을 많이 했다. 멋진 것, 좋은 것에 전혀 관심 없는 척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여우와 신포도였다. '과시는 곧 결핍'이라는 말을 맹신하게 된 데에는 이런 과거의 경험이 한몫한다. 나는 있는 척, 그러나 태생이 수더분하여 돈에 관심 없는 척에 무진장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이제야 소리 내서 말한다. 나는 돈이 좋다. 돈은 좋을 수밖에 없다. 돈이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 그것을 좇지 않을 수 있나.




한 번은 친구들과 로또 1등이 되면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누구는 주식을, 다른 누구는 부동산에 투자할 계획을 나열했다. 또 다른 낭만주의자는 질릴 때까지 세계여행을 하면서 돌아다니겠다고 했다. 나는, 나는 몽땅 통장에 넣어두고 매일매일 큰 금액이 찍힌 통장을 꺼내어 보면서 돈 테라피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소망의 이면에는 내 마음을 넓히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동안 가난에 시달리며 한껏 쪼그라들어버린 내 마음의 여유를 넓히고 싶다.


갑자기 고장 난 가전제품의 수리비에 마음 졸이기 싫었다. 엄마가 외할머니 병원비에 보태게 20만 원만 보내 달라고 연락 왔을 때, 외할머니의 건강보다 통장의 잔액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약속이 생기면 몇 끼를 냉장고에 있는 재료만으로 버틸 수 있나 헤아려보는 것도 이제 지겹다.


아쉽게도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렇다. 가난의 후유증에는 이자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것들을 몽땅 쳐내는 데에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드물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에어컨 틀었어? 엄마는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아니, 아직 안 더워. 내가 대답하자마자 엄마는 '꼽꼽쟁이처럼 그만 아끼고 이제는 제발 에어컨이라도 켜고 살아!'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아니, 아직 참을만해서 그런 거야. 정말이야.


진심으로 속상해하는 엄마를 어르고 달래 전화를 끊은 다음 날씨 앱을 켰다. 29도. 얼마 전 푹푹 찌던 34도짜리 하루를 견뎌낸 다음이라 그런지 정말로 괜찮았다. 기온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더 더워진 것 같았다. 숨을 수동으로 쉬게 되어버린 것처럼 머리끝부터 훅 하고 더운 공기가 나를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나는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사진을 찍은 다음 엄마에게 전송했다. '됐지?' 엄마는 됐다는 말 대신 당신도 결국 에어컨을 틀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금세 서늘해진 방 안의 공기에 세탁실에 잠들어있던 고양이가 걸어 나와 방 한구석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더웠으면 말을 하지. 괜히 머쓱하고 미안해서 그렇게 말하며 녀석의 뽀얀 핑크색 배를 쓰다듬었다. 내 옹졸한 마음을 감당하느라 괜한 고양이가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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