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죽길 잘했지 뭐야
화면의 단출한 전화번호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070으로 시작하는 어느 기업의 전화번호는 기업 소개 사진 조차 빈 화면이라 마치 유령기업 같았다. 바로 전화가 연결되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차라리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괜히 시계를 보는 시선.
이 회사, 10시부터 점심 먹는 멋진 회사였으면 좋겠다.
개인회생이 끝나고 면책이 결정되면 채권을 가지고 있던 금융회사들은 공공 기록을 삭제하는 것이 원칙이다. 법의 말을 제깍제깍 잘 듣는 은행과는 달리 대부업체 일부는 기록 지우는 것을 잊거나 미루는 일이 잦다.
나라고 예외일 리가. 모 회사에 남아있는 대출 기록이 손톱의 거스러미처럼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언젠간 지워지겠지 하고 놓아둘만한 장르가 아니었던 것이다.
채권 중 하나가 몇 개 회사를 돌고 돌아 지금은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기업의 소유하에 있었고, 이제 나는 그토록 두려워했던 대부업체에 직접 전화를 걸어야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항상 그쪽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대던 입장이었으니.
첫 용기는 무응답으로 끝이 났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첫 번째 통화에 가지고 있던 용기를 전부 쏟아낸 탓에 이후로 거의 일주일 넘게 전화번호를 노려보기만 했다. 내일의 내가 할 거야. 아니면 또 그다음 날의 내가. 음, 아니면 먼 미래의 내가.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 처음 전화번호를 검색했던 그 요일로 돌아왔을 때에야 용기가 났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무뚝뚝한 음성이 전화를 받았다.
"그, 저기, 대출 기록 삭제 좀 부탁드리려고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최세나요."
"네. 처리해드릴게요."
잠깐만요. 아직 끊지 마세요! 제일 중요한 부분이 남았는데.
더듬더듬 준비했던 말을 하자마자 음성만큼이나 쌀쌀맞게 전화가 뚝 끊겼다. 언제 처리된다는 말도 없었고, 내 이름 석자만 가지고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까지 했지만 일단 끊긴 전화를 들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젠장. 내가 해냄.
짧은 통화로부터 꼭 2주일이 더 지난 후에 휴대폰에 깔아 두었던 뱅킹 어플에 알람이 하나 떴다.
'고객님의 신용 점수가 변동되었습니다.'
곧장 어플을 켜서 확인해보니 내 신용 점수가 상위 90%라고 뜬다. 얏호. 펄쩍 뛸 듯이 기뻤다. 왜냐하면 지난 5년간 내 신용 점수는 상위 98%였으니까. (다시 말해 하위 2%였단 얘기다.) 무려 8%나 펄쩍 건너뛴 내 성장에 건배를 해야겠다. 나, 오늘 밤엔 꼭 맥주 사 먹는다.
시원하게 따지는 맥주 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드디어 보통의 삶에 한 발 다가간 거야.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끝나버린 전화 한 통이 삶에 이만한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더도 덜도 않고 딱 상위 70% 까지만 점수가 오르면 좋겠다. 열심히 월급 받아 꼬박꼬박 세금을 내다보면 언젠가는 진짜 보통이라고 불릴만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꿈같은 일이다. 보통의 삶을 꿈꿀 수 있게 되다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친구들과 내 집 마련의 꿈에 부푼 이야기를 했다. 대한민국 어딘가에 해가 잘 드는 방 한 칸 정도를 가지게 될 날이 올까? 그날이 저절로 오길 바라진 않는다. 그저 내가 노력한 만큼, 딱 그만큼씩만 가까워진다면 좋을 텐데.
벽에 등을 기대고 머물고 있는 월세방을 돌아보았다. 폭풍 같던 지난 5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새벽에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고 사라진 날,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받던 날, 옥상에 올랐다가 패배자가 되어 돌아온 날, 면도칼을 분해해서 온 몸에 흔적을 남기던 날, 온갖 잔인했던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엄마 아빠가 비상금을 탈탈 털어 세탁기를 사준 날, 하루를 처음 만나던 날, 친구들과 꼬질꼬질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자던 날, 새 직장 합격 전화를 받던 날.
내가 연민했던 만큼 모든 날이 고난의 연속이었던 건 아니었다. 삶은 때때로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 같은 기쁜 순간을 선물했고 그때마다 옥상을 뒤로하고 지상을 밟았던 것이다. 내게 지난 삶은 그런 것이었다.
다들 평범을 꿈꾸고 사는 거야.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응, 맞다. 보통이 되는 것은 놀랍게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평범하게 살기 싫다며 고향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대학에 원서를 던져 넣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리고 패기 넘치던 과거의 나야, 듣고 있니? 서른두 살의 너는 평범을 격렬히 꿈꾸며 맥주 한 캔에 얼굴이 벌게지는 미완성의 인간이란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길 바라.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망한 건 아니거든. 정말이지, 안 죽길 잘 한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