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올 때.
미래 (명사) : 앞으로 올 때.
'나의 미래는 아마도'
정신과에서 건네준 문장 검사지에 그 단어가 있었다. 나의 미래는 아마도.
정답은 없으니 생각나는 대로 작성하라던 선생님의 말씀대로 거침없이 문장을 완성하던 나는 그 문제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나의 미래는 아마도, 몇 번이나 곱씹어봤지만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결국 다음에 이어지는 수십 개의 문장을 모두 완성한 뒤에야 다시 '나의 미래'로 돌아왔다. 시간을 지체해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캄캄하다. 나는 겨우 빈칸에 '그냥 그럴 것이다'라고 적었지만, 머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혼란에는 온점을 찍지 못했다.
얼마 전 결혼한 직장 동료 R은 남편과 함께 노후 대책을 세운 경험에 대해 말해주었다. 우리가 노후에 월 200씩만 쓰면서 살아도 10억 남짓한 자금이 필요해. 월급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계획을 짜고 있어.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V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월급으로는 힘들겠지만, 10년쯤 뒤면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도통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미래의 일을 생각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미래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와 친했던 적 없다. 그 둘을 붙여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나'대로, 미래는 '미래'대로 서로의 주변을 겉돌았다. 어릴 때 노란색 몸통에 삼각형으로 된 빨간색 모자를 쓴 우주선 안에 웃는 얼굴을 그리면서 이게 나야, 하고 천진히 웃던 그 시절을 제외하면, '나'와 '미래'는 한 번도 함께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그런 줄 알았다. 미래라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그림 안에, 혹은 미래를 점치고자 하는 허황된 자기 계발서 안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 두 단어를 합치는 일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라는 생각은, 그러니까....
마구잡이로 펼쳐놓은 몇 개의 다이어리에는 늘 현재의 내가 있고 그것을 보는 나는 과거를 되짚는다. 다만 그뿐, 거기엔 목표가 없다. 가까운 미래, -가령 누군가의 생일이나 2주 뒤 만나기로 한 약속 같은 것들- 그것들은 항상 내가 아닌 외부의 무언가에 기대어 위태로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미래가 거기 있을 리 없는데, 나는 한참이나 망연자실 다이어리를 바라보았다.
나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공상을 멈추려야 쉽게 멈추지 않던 머리는 '나'와 '미래'라는 단어를 끼워 넣는 순간 건전지를 잘못 끼운 기계처럼 동작을 멈춰버린다. 금방이라도 퍼져버릴 듯 탈탈 소음을 내며 겨우 돌아갈 때에는 피할 수 없는 몇 가지 이별을 토하곤 다시 끔뻑 공허로 돌아가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이별들. 언젠가 내가 잃게 될 것들. 며칠간 빈칸에 대해 골몰한 결과는 그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갑작스레 떠올라버린 몇 개의 이별과 상실을 잊기 위해 나는 빈칸 채우기를 포기한다. 지금까지 비워둔 채 살았지만 별 문제없었으니까, 하고 숭숭 난 마음의 구멍에 뭔가를 덧대 보려 애를 썼다. 그냥 무슨 이유든 떠오르기만 하면 마구잡이로 가져다 붙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현실을 버티는 데에 힘을 너무 쏟아버렸는가 보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