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1
작년 초, 회사에서는 각자의 목표를 설문받았다. 업무 상의 목표와 함께 개인적인 목표도 함께 타입 캡슐 형태로 기록해 두는 행사였는데 나는 거기에 ‘책 150권 이상 읽기‘를 적어 내었다. 근 4년 평균 독서량이 150권 정도였으므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1월, 신년 행사를 진행하는 프롬프터에 내 이름이 떴다. 목표를 달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품과 함께!
그 후로 회사 사람들에게 독서 모임 운영을 몇 번 권유받았다. 사람을 싫어하는(무서워하는) 나인지라 처음엔 듣자마자 질색했지만, 요즘 자꾸만 생각이 난다. 독서량을 채우기보다는 뭐랄까, 좀 더 깊이 있는 독서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매주 도서관에 가서 독후감을 쓰는 아콘(Acorns)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책을 더 깊이 있게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서 필사를 하기도 하고 독후감도 쓰고는 있지만 어쩐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아무래도 모든 활동이 혼자 하는 일에 치중되어 있어서일까?
20대의 나는 사람을 정말 좋아했다. 앱으로 온갖 모임에 가입해서 놀러 다니고는 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쉽게 친해졌고,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뒤풀이에 꼭 따라갔다.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면서 깔깔대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술 마시는 모임 보다 정적인 독서 모임에 참석하는 것만 상상해도 아찔하다.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발언하기? 꿈에 나올까 무섭다! 참석만 상상해도 이 정도인데 운영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근데, 비대면 모임은 괜찮지 않을까. 글을 쓰고 댓글을 다는 것 정도라면….
머릿속에서 공상 중인 비대면 독서 모임 얘기는 이쯤 하고, 여하간 그래서 뜬금없이 독서 모임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다는 이야기이다.
의외로 도서관에는 독서 모임에 관한 책이 꽤 있었다. 그중 가장 예쁜 초록색을 가진 <아무 날에 독서 모임>을 골라 집어 들고 나왔다.
<아무 날에 독서 모임>은 그야말로 독서 모임을 시작하고, 운영하고, 지속하는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거의 운영자를 위한 책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독서 모임을 하지 않더라도, 혼자서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해 시도해 볼 만한 방법들도 조금 있어서 따로 기록해 두었다. 게다가 추천 도서 목록이 따로 부록으로 있어서 모조리 사진을 찍어두었다.
독서 모임을 운영하려면 우선 내가 왜 독서 모임을 시작하려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인가? 책 읽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인가? 목표가 확실한 모임이 오래간다.
그다음은 규모. 어느 정도 인원이 적당할 것인가?
그리고 그다음은 운영 방법인데, 이 목차에 가장 공을 들인 것 같다.
모임 운영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이 부분을 유심히 읽었다. 재미있는 운영 방법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전부 대면 방식이라 비대면 모임을 계획하고 있는 내겐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친구들과 하게 된다면 나름 실행해 볼 법한 재미있는 놀이(?)들이 많았다. 책을 읽고 모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질문 목록도 제공한다.
특히 독서 모임에서 청소년 책을 읽기 좋다는 팁은 꽤 신선하고 좋았다.
나 역시 청소년 도서를 굉장히 좋아한다. 성인을 겨냥한 소설은 지나치게 자극적이기만 할 때가 많고 에세이는 유행을 엄청 탄다. 반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책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착하다(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청소년 비문학 도서들은 어찌나 친절한지!
그러므로 아직 청소년 도서를 시도해보지 않은 독서인이 있다면 추천드린다. 꼭 독서 모임이 아니더라도.
또 목차를 옆에 펼쳐두고 읽기, 디자인이나 가독성에 대해 생각하기, 내가 작가(혹은 주인공)라면 어떨지 가정하기, 책 큐레이션하기, 책과 관련된 장소 찾기 등등. 내가 생각했던 ‘독서량이 전부가 아닌 독서 방법’에 대한 힌트가 몽땅 이곳에 모여있었다. 굳이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아도 시도해 봄직한 다양한 독서 활동들이다.
의외의 책에서 좋은 힌트를 얻어 기분이 무척 좋다. 그런데 읽을수록 독서 모임을 운영하기는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독서 모임’이 ‘독서’에 가까운 활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이다.
‘독서 모임’은 '독서' 보다는 '모임'에 훨씬, 훨씬 가깝다.
이건 정말 힘들다. 왜냐면 나는 독서의 정적이고 독립적인 면을 사랑해서 독서 모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이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동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다. 나와 똑 닮은 사람들만 가입한다고 해도 n명의 내가 만나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정말이지 가지각색이다.
책을 보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독서 모임에 나타나고, 그것보다 더 다양한 상황이 생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다양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면접에 가서도 스스로를 굉장한 팔로워 성향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인데 모임 운영이라니!
미쳤지, 미쳤어. 아무래도 결심을 했을 때 더위를 먹었었나 보다. 새삼 이 세상의 모든 모임 운영자분들 존경합니다.
오늘도 어슬렁, 도서관을 배회하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 아니, 초식동물이 있다. 어디 나랑 같은 책 읽고, 비슷한 듯 약간만 다른 감상을 가지고 있으며, 나랑 맞는 호흡으로 의견을 나누고, 취향에 꼭 맞는 새로운 책을 큐레이션 해 줄 사람 없나,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