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죽을까? 왜 비슷한 불행 앞에서 어떤 이는 삶을 저버리고 또 어떤 이는 끝내 살아남을까? 삶이 괴로울지라도 내일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 때, 이 삶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아는 이들은 차마 생을 놓지 못한다. 그 무게에 짓눌려 괴롭고 버거울지라도 묵묵히 견뎌내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괴로운 시기를 지나 언제 힘들었냐는 듯 다시 웃고 그 시기를 딛고 일어난 만큼 더욱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나는 이 질문을 뉴스보다도, 드라마와 영화 앞에서 더 자주 떠올렸다. 대중문화는 희망보단 절망을 먼저 보여주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주목할 점은 그 절망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묵묵히 살아가는 삶을 비춘다는 점. 그렇게 보면 연대감을 일깨워주는 콘텐츠, 불행을 묵묵히 버텨낸 서사는 단순한 위로 차원이 아니라, 삶을 지속하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 또한 그 안전망 덕분에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내 삶을 이어가게 한 것은 거창한 신념이나 강한 의지가 아니라, 다음 회차가 기다려지는 드라마였고 복잡하게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소설이었으니까. 만약 그런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겪는 고통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누구와 연결되는지 짐작할 상상력조차 사라져 더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보게 하고 삶에서 찾아오는 시련을 묵묵히 견디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게 보면 콘텐츠업 또한 사람을 살리는 '활인업(活人業)'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콘텐츠가 해야 할 역할도 명확하다. 불행을 전시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 시간을 묵묵히 지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물론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명확한 답 대신 질문을 던지는 콘텐츠도 필요하고, 끝내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를 남기는 서사 역시 생각할거리를 주니까.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지금,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같은 콘텐츠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사유의 계기가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버거운 질문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보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지를 아는 일 또한, 콘텐츠를 향유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감각이 된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콘텐츠란 고통이 끝난 이후의 삶 역시 존재함을 각자의 방식으로 전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오늘을 버텨낸 사람에게 내일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