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이 '이해'가 되고 공존으로 이어지는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하는 것
드라마부터 영화, 각종 전시와 문학까지, 우리는 왜 '콘텐츠'를 향유할까. 아마도 그것은 서로 다른 너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평생 1인칭 시점에 갇힌 '나'로서 타인의 마음을 감히 짐작해보려는 시도일 것. 그 노력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공존과 화합의 감각을 익혀나가는 게 아닐까. 이로써 이 세계가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일 테고.
최근 읽은 문화잡지 〈쿨투라〉 12월호로 이 확신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쿨투라>는 전시와 문학, 아티스트, 드라마와 영화 등 다방면의 콘텐츠를 주제로 한 평론을 제공해 독자인 나에게 계속해서 '서로 다름'에 대한 의미를 곱씹게 했다. 예술이란 결국 서로 다른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언어라는 점을 이 잡지는 반복적으로 상기시켰다.
공연 〈춤이 되고 말이 되고〉는 언어 자체가 다른 이들이 만나 교감하는 장면을 전면에 내세운다. 각각 수어와 음성언어, 탈춤을 내세운 이들이 각자의 언어로 무대에 올라 '상대에게 어떻게 닿을지' 고민한다. 그러다 마침내 새로운 '시각 언어'를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언어가 하나의 감각으로 완성되는 이 장면은 화합이라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로 다른 언어가 하나로 이어졌듯, 이런 연결은 작품 밖에서도 발견된다. 드라마 <김부장 이야기>와 <태풍상사>를 각각 "X세대 중년의 초상", "X세대의 청춘"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각 작품의 연관성을 짚어낸 대목은 하나의 시대적 맥락으로 두 작품을 읽어내는 관점의 즐거움을 환기한다. 각각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함께 놓고 볼 때 더욱 입체적인 의미를 만들어냄을 알려준 것이다.
이 잡지가 말하는 '다름'은 개별 작품이나 장르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개인의 삶 안에서도 다양성이 작동함을 보여준다. <태풍상사>의 강태풍 인생사를 다루는 대목이 그랬다. "꽃을 좋아하던 청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물음, 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꽃에 대해 "자그마한 흔적으로만 남았다"라는 분석은 삶이 하나로 고정돼 있지 않고, 선택과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동물들이 모여 공존을 논하는 <주토피아2> 역시 이 흐름에 놓여 있다. 잡지는 <주토피아2> 성우들을 한자리에 모아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글을 보면 주디 역의 지니퍼 굿윈은 “대사 하나를 4시간 동안 붙잡고 있어도 되고, 여러 버전을 계속 시도해볼 수 있었다"면서 "제 뒤에는 모든 소리를 수집해 캐릭터를 만들어주는 수백명의 팀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 인터뷰는 하나의 캐릭터가 수많은 사람의 손과 목소리를 거쳐 완성된다는 점에서, 우리 각자 안에도 무수한 다름이 공존하고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평론가는 성해나의 문학을 두고 "진짜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질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짜'라는 개념 역시 필요하다는 점 여기서 진짜와 가짜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규정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게 보면 성해나의 문학 역시, 이 잡지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서로 다름의 공존’이라는 태도 위에 놓여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이 잡지가 다방면의 장르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름이 서로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다름 속에서도 예술이 끝내 붙들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는 ‘연결’이라는 것. 이슬람 문화 전시에 대해 “예술이라는 보편적 언어가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한다”라고 말한 샤이카 나세르 알-나스르 관장의 발언은 이 잡지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이 서평은 해당 도서의 협찬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