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
"왜 누나 친구가 (누나) 실내화 가방을 들고 있어?" 동그란 얼굴에 단정히 묶은 머리를 하고 학교를 오가던 내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날, 초등학생이던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S의 동생과 마주쳤다. 마침 내 손에는 S의 실내화 가방이 들려 있었고, 그녀의 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S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위바위보 져서 들고 가는 거야."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그리고 네 누나는 같은 반 아이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가득 찬 진실은 꺼낼 수 없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손에 들린 실내화 가방도 그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처음에 S는 친근한 얼굴로 다가왔다. 웃으며 내 옆에 앉아 "이거 좀 도와줄래?"라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은 정말 다정해 보였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부하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이거 들어줄래? 손 아프다."라며 내게 가방을 떠맡기거나, "용돈 좀 빌려줘. 다음 주에 꼭 갚을게."라고 말하며 돈을 요구했다. 그 모든 요구는 거절하기 힘든 억압처럼 느껴졌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사람을 괴롭히는 잔인한 마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고통받아야만 하는 걸까? 매일 밤 이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대체 뭐길래, 내 삶을 이렇게 짓밟고 있는 것인지.
나는 왜 그때 그저 당하고만 있었을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마 S의 실내화 가방을 던져버리면서 한마디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 애가 나를 함부로 보지 못하게 맞서 싸웠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렇게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나 겁에 질려있었다. 그 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매섭게 올라간 눈매가 너무 무서웠다.
사실, 그 아이만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약육강식의 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은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몰려들었다. S에 이어, 지능적으로 나를 못살게 굴었던 Y, 괜한 시비를 걸며 패거리로 몰려다니던 아이들까지, 그 아이들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나에게 과거의 이런 아픔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문동은이 가해자들에게 하나씩 복수해나가는 장면에서는 통쾌함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현실 속에서 여전히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을 떠올리며 씁쓸함이 밀려왔다. 드라마 속 문동은은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라며 복수에 나서지만, 현실의 '문동은들'은 여전히 아파하며 숨죽인 채 사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드라마 속 문동은처럼, 나 역시 내가 겪었던 고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피해자가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할 상처를, 다른 이들은 단순한 어린 시절의 철없는 장난으로 치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밀려온다. 그들의 사소한 행동이 내 영혼을 산산조각냈던 그 날들을, 그들이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분노와 함께 나를 무너뜨리곤 한다. 그때 나를 짓밟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나는 그들이 내가 느꼈던 고통의 크기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불행을 겪길 바란다. 설령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나를 친구라 착각하며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 채 평생 비루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나 자신에게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렇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내 줘서 정말 고맙다고. 학교가 두렵고,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으며,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던 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느낌 속에서 홀로 버텨야 했던 나. 마치 내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고통을 묵묵히 짊어진 어린 나. 지금 떠올려보아도 그때의 나는 너무 작고 연약했지만, 그럼에도 놀랍도록 강인했다. 그 고통 속에서조차 나를 지켜냈던 어린 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미안한 마음이 밀려온다.
이제 나는 그때의 나를 향해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네 자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해.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어. 너는 절대로 그렇게 짓밟힐 만큼 하찮은 존재가 아니야. 네가 느꼈던 고통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너 자신을 존중하는 당연한 권리야. 네가 그 모든 고통을 견디고 살아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어. 그러니 네 자신을 사랑하고, 네 아픔을 더는 숨기지 말아줘.”
그리고 깨닫는다. 그 시절의 나는 나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나를 지켜낸 존재였다는 것을. 어린 나는 매일매일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가며 고통 속에서도 버텨냈고, 그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이제 나는 그때의 나를 안아주고, 보호하고, 치유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그 시절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절의 나를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