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다리를 놓는 일이다

기술보다 예를, 경쟁보다 교류를

by 소선

“왜 배우는가”라는 질문 앞에,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질문일 수 있지만, 막상 곰곰이 생각해보면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의 나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

취업에 유리해지기 위해서 배워왔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배움은 어느새 경쟁을 위한 수단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이유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말이 원래 담고 있던 무게나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배움’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나 선택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학교 현장을 보면,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기술을 습득한다.

정보 처리 능력도 뛰어나고, 문제 해결 방식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성장이 교류나 소통의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아 보인다.

어쩔 땐 아이들끼리 깊이 있게 이야기하거나,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장면을 보기가 쉽지 않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관계를 맺고 풀어가는 힘은 오히려 약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지금의 교육 구조가 지식의 축적에는 능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방식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말 중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하나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 문장을 들을 때마다, 배움은 책이나 시험보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공자는 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는데,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배움은 그런 기쁨보다는 경쟁과 숙제, 피로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타인을 자연스럽게 경쟁자로 여기게 되고,

서로에게 배우기보다는 서열을 나누는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한 시대였지만, 이제는 “왜 배우는가”를 다시 묻는 일이 더 절실해진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질문 끝에는 이런 물음이 따라붙는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있는 걸까?



이 글은 그 물음에서 시작된 생각들이다.

분명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마음의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려 한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배우는 것’이란, 단지 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를 익히는 일에 더 가까운 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술이나 지식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사람됨 위에 얹히지 않으면 제대로 쓰이기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종종, 어떤 사람이 실력이 뛰어나지만 함께 일하기는 어려운 경우를 본다.

그 사람의 능력은 인정되지만, 말을 나누거나 협력해야 할 때 벽을 느끼게 되는 경우다.

그럴 때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기술은 충분히 익혔지만, 함께 살아가는 법은 충분히 배운 걸까?’


사람됨이 기술보다 먼저여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기술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누구를 배제하거나 누를 수도 있다.

하지만 덕(德)과 예(禮)는 그 기술이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관계를 맺고, 공존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돕는다.


유교에서 말하는 ‘예’는 단순히 형식을 지키는 예절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타인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공자가 말한 “예”가 지금의 교실이나 가정 안에서 살아 있다면,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교실 풍경을 보면, 아이들이 말을 나누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 이야기를 편안하게 꺼내기보다는, 정답을 맞히려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모습은 아이들이 스스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닐까 싶다.


기술은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그 방법은 비교적 분명하다.

단계적으로 연습하면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온다.

하지만 덕과 예는 그렇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모범을 보고 배우는 것, 실제 상황 속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조금씩 나를 다듬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가르친다”는 말보다 “보여준다”는 말이 더 교육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자주, 서로를 존중하고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


또 하나의 생각은 이것이다.

기술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도구이지만, 그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과 태도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술은 결국 따라오는 것이지, 앞장서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교육이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면, 그 시작은 능력 이전에 태도, 지식 이전에 마음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말이 조금은 더 와닿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기술보다 덕이 먼저이고, 경쟁보다 교류가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경우가 많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교육이 다시 회복해야 할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우리가 배우지 못했던 것은 기술이나 이론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법, 함께 살아가는 법이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요즘 아이들은 똑똑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이전 세대보다 빠르고,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그런데 정작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거나, 갈등을 조율하고, 생각을 나누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생각보다 자주 보인다.


그건 아이들 탓이라기보다, 어쩌면 우리가 그걸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교육이 교류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친하게 지내자’는 단순한 구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경청하는 태도, 말을 건넬 때의 온도, 입장을 바꿔보는 상상력, 그리고 다름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시험 문제로 출제되지도 않고, 정답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능력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종종, 교류란 결국 나를 상대에게 열어주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상대도 완벽하지 않고, 나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되는 것 같다.


지금의 교육은 여전히 결과 중심이다.

점수와 등급, 순위와 입시.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될 때 우리는 사람을 잃는다.


이제는 교육이 조금 방향을 틀어야 하지 않을까.

정보를 주입하고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를 이해하는 감각을 기르는 교육.

질문하고, 경청하고, 다름을 존중하는 태도.

그런 것들을 교육의 핵심 목표로 삼는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나는 교육이

“자신만의 다리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타인과의 다리를 놓는 일”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그 다리는 늘 흔들릴 수 있고,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건너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자체로 교육은 제 몫을 해내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는 여전히 배워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더 배워야 할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단한 이론이나 정책이 아니라 이런 조용한 마음 하나다.

그 마음에서, 다시 배움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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