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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Nov 05. 2020

열락(悅樂)의 소리-기청 소시집


      



월간 문학공간 20. 10월호 발표




기청 시인/ 소시집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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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開眼)




노란 햇병아리 첫눈 뜨는 날


구름도 잠시 빛을 가려


동공(瞳孔) 활짝 열리네




개안(開眼)은


또 하나 우주의 열림


무수한 별빛 너머


제 고향 알아보듯




내 안의 푸른 연못 속


파문(波紋)에 일렁이는


푸른 별 하나


어느 새벽, 샛별로 떠서




고향 가는 길 훤히


비출 것인가.






물레방아






내 어릴 적


방아마을 외딴 곳


물레방아는 홀로 돌았지


낮 밤 없이 돌았지




후끈 달아오른 여름날 밤


동네 아이들 몰래 만나


풋사랑 나누던 밤도


저 혼자 돌았지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낡은 물레방아가 삐걱거리며


절로 저절로


내 깊은 곳에 덩더킁


쓸쓸한 여운을 남기고




그때 나는 몰랐지


삶과 죽음,


윤회의 끝없는 물레방아


왜 그리 돌고 도는지.






삼밭에서






그땐 마을 집집마다


삼농사로 밤을 잊었지


키 큰 삼나무 밭에 유령이


산다는 소문도 깜빡 잊은 채




달뜨는 밤이면


개구쟁이들 술래잡기 놀이


삼대 밭에 숨어서 보는 보름달


왜 그리 크고 밝은지




삼밭에 쭈그리고 앉은


그 녀석 흘러내린 삼베 바지춤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시퍼런 등불 켜고


어지러이 삼밭을 누비던 유령


정체불명의 반딧불이


왜 그리 오싹하던지.






화살






텅 빈 과녁을 향해


텅 빈 시공(時空)을 날아


텅 빈 빛의 허무만 차곡차곡


제행무상(諸行無常)




너와 나의 거리


먼 과거와 낯선 미래의 거리


바람과 빛과 구름 사이


가르는 무한의 간극(間隙)




창세(創世)와 개벽 사이


솟구치고 꺼꾸러지는 번뇌의 계곡


뛰어넘어 생사를 넘나드는 저


불멸(不滅)의 화살.






빛과 소리






어디서 왔나


새벽하늘 반짝이는 먼 별빛


내 안 고요히


빛나는 영감(靈感)의 별빛




어디서 왔나


이 가을 눈물 짜는 풀벌레 소리


내 안 가득히


울려오는 열락(悅樂)의 소리.






시작(詩作) 메모---------






살면서 잊고 살아온 기억의 편린, 혹은 끊임없는 물음으로 반추하는


화두 같은 것, 그런 몇 가지 소재를 운문형식으로 풀어본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이 기적 아닌가?


지수화풍(地水火風), 땅과 물 불과 바람으로 인연지은 사람의 몸과(물질요소)


수상행식(受想行識), 느낌 생각 의도 의식의 마음(정신요소)의 결합으로


잘도 살아간다. 배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잠 자고 화나면 성질부리면서-


그리고 태어나서 눈 감을 때까지, 돌이는 돌이답게 갑순이는 갑순이 답게


살아간다. 어느 날 갑자기 돌이가 갑순이가 되는 그런 혼란은 없다.


그처럼 일관성 있고 개성이 발현되는 자아의 정체성,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너와 나의 분별이 생기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 아트만(참나)는 존재하는가? 힌두식 아트만(불변의 실체가


있는)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착각 속에 그런 줄 알고 살아간다.


지독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이런 헛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대자유의


해탈(解脫)이라 말한다.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있는 기억, 더 깊은 심층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자아의 각성이야말로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촉진제가 된다.



시여 날아라, 더 깊은 더 은밀한 내면의 솟구침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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